류연복의 목판화는 칼이 나무를 파는 소리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한복판에서 벽화를 그리고 판화를 찍었던 그는, 오늘도 안성의 작업실에서 자연과 인간과 삶의 결을 나무 위에 새긴다.
먼저 발로 걷는다
류연복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먼저 걷는다.
백두산을 걷고, 금강산을 걷고, 독도에 발을 딛는다. 철조망이 가로막은 DMZ 일대를 돌아다니며 스케치한다. 분단이 갈라놓은 땅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기록한 뒤 작업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무판 앞에 앉아 칼을 든다.
걷지 않은 땅은 새기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원칙이다.
홍대에서 안성까지 — 저항의 언어를 찾아서
류연복(1958~)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984년 졸업한 그는 곧바로 사회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1985년 서울미술공동체를 이끌었고, 1987년에는 걸게그림패 '활화산'의 멤버로 활동했다. 거대한 천 위에 그려진 민중의 얼굴들이 집회 현장을 채우던 시대였다.
이후 민족미술협의회 사무국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대외협력국장을 거쳤다. 예술이 현장 밖에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이 그를 움직였다.
1993년, 그는 경기도 안성에 정착했다. 저항의 목소리에서 생명의 이야기로. 자연 속에 살면서 그의 작업은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판화는 여전히 칼로 하는 일이었지만,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이 달라졌다.
칼이 나뭇결을 따라갈 때
목판화의 본질은 직접성에 있다.
나무판을 칼로 깎아내는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입장을 담는다. 매끄럽게 다듬을 수도 없고, 실수를 지울 수도 없다. 깎아낸 자리는 희어지고, 남긴 자리는 검게 찍힌다. 그 투박하고 결연한 성질이 류연복이 이 매체를 놓지 않는 이유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이 미술의 주요 도구가 되어가는 시대에도 그는 여전히 나무판과 조각도에 집중한다.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다. 목판의 나뭇결을 따라 칼이 움직일 때, 예술가의 호흡과 리듬이 그대로 작품에 전사된다. 이 물질적 진정성을 디지털로는 대신할 수 없다고 그는 믿는다.
상처 입은 국토를 어루만지다
그가 만든 〈북한산을 거닐다〉 연작을 보면, 이것이 단순한 풍경화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2013, 한지에 목판화, 38×165cm)의 긴 화면은 산을 옆으로 걷는 시간을 담는다. 발걸음의 기억이 판 위에 새겨져 있다.
그의 국토 탐방 작업은 분단의 현실에 대한 예술적 응답이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산, 가볼 수 없는 땅, 그러나 이 땅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기억. 나무에 칼을 대고 그 산을 새기는 행위 속에는, 역사의 흉터를 손으로 만지는 예술가의 감각이 담겨 있다.
1986년 오사카와 도쿄의 한국민중판화전, 1989년 미국 LA 순회전, 2008년 미국 한국문화 잡지 『진달래(Azalea)』 소개, 2009년 아랍에미리트 샤자대학교 강의·전시까지. 그의 판화는 국경을 넘어 이야기를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