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마흔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판화가 오윤. 그가 나무판 위에 새긴 민중의 춤사위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씨앗페 2026에 출품된 사후판화 18점은, 그의 예술이 동료 예술인의 금융 안전망으로 다시 태어나는 역설적이고도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오영수의 아들이 칼을 들었을 때
소설 《갯마을》로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새긴 오영수. 그 아들이 나무판 앞에서 조각칼을 들었을 때, 아무도 그것이 한국 미술사를 바꿀 한 획이 될 줄 몰랐다.
오윤(1945~1986)은 서울대학교 조소과에서 서구 미학을 익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반대 방향을 향했다. 박물관 유리 뒤의 예술이 아니라, 공장 담벼락과 골목에서 숨 쉬는 예술. 그는 그걸 찾아 목판화로 왔다.
목판화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다. 한 번의 칼질은 되돌릴 수 없다. 깎아낸 자리는 흰 여백이 되고, 남긴 자리는 검은 형상이 된다. 그 투박하고 결연한 성질이 오윤의 예술 정신과 딱 맞았다.
한(恨)과 신명 사이
오윤의 판화 속 인물들을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절대로 약하지 않다.
굵고 거친 선으로 그려진 몸짓들, 어깨를 들썩이는 춤사위들. 억눌린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다. 〈칼노래〉의 날카로운 긴장감, 〈낮도깨비〉의 유머 섞인 풍자, 〈남녁땅뱃노래〉의 장쾌한 리듬감. 그는 한국인의 심층에 깔린 '한(恨)'을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그것을 단숨에 터뜨리는 '신명'의 에너지를 포착했다.
탈춤, 무속, 도깨비. 서구 미술에 물든 화단이 외면하던 소재들이었다. 오윤은 그것들을 정면으로 끌어들여 한국적 원형을 되물었다.
"미술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야 한다."
이 신념은 말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판화를 시집 표지에, 노동 현장 전단지에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돈을 받지 않고. 유명세를 고집하지 않고. 그것이 그에게 예술의 공공성이었다.

판화가 가진 복수성의 미학
판화는 하나의 원판에서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다. 이것을 '복수성(複數性)'이라 부른다. 유화나 조각처럼 단 하나뿐인 작품과는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