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20여 년간 추상 회화를 탐구해온 김레이시 작가. 선과 색의 층위를 쌓아 올리는 그의 캔버스에는 언어 이전의 순수한 감각이 흐른다.
그림을 그리기 전, 김레이시는 숨을 고른다. 붓을 들기 전의 그 정지 상태. 생각이 아직 언어가 되지 않은 순간. 그것이 그의 작업이 출발하는 자리다.
뉴욕과 서울 사이에서 찾은 언어
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김레이시는 바다를 건넜다. 영국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에서 MA를,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MFA를 마쳤다. 뉴욕, 시카고, 빈, 마이애미의 갤러리들을 거치며 국내외 90여 회의 전시를 이어왔다.
그러나 지리적 이동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전환이었다. 구상 작업으로 회화의 뼈대를 익힌 뒤, 그는 추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형태를 버리고, 대신 선과 색 그 자체를 이야기의 주체로 세웠다. 그 결정이 이후 모든 것을 바꿨다.
뉴욕 브루클린의 갤러리에서 시작한 Dialogue of Silence 연작(2010~2012)이 그 첫 전환점이었다. 침묵과 대화. 역설적인 두 단어가 짝을 이룬 제목처럼, 그의 그림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말했다.
Before Mind — 말이 생기기 전의 상태
김레이시의 연작 제목들을 거꾸로 읽으면 하나의 시가 된다.
, Before Thinking, Before Any Words. 마음 이전, 생각 이전, 언어 이전. 작가는 의식이 개입하기 전의 그 고요한 구간을 캔버스 위에 붙잡으려 한다.
그 방식은 단순하지 않다. 선들은 서로를 가로지르고, 색의 층위는 겹쳐 쌓인다. 아크릴이 아닌 Oil on canvas를 택한 것도 이유가 있다. 오일은 느리다.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 느림 속에서 작가는 다음 층을 얹는다. 하나의 그림 안에 시간이 중첩된다.
2022년 갤러리한옥 신진작가공모전 최우수상, 이후 다수의 공모 선정. 작업의 밀도가 외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흩어지고, 돌아오고, 다시 빛이 되어
씨앗페에 출품된 근작들은 세 가지 움직임을 따른다. 흩어짐, 귀환, 빛의 산란.
은 화면 밖으로 번져나가는 에너지를 담는다. 는 반대로 화면 안으로 수렴한다. 와 는 빛이 화면 전체에서 터진다.
크기는 제각각이다. 60.6x60.6cm의 정방형 대작부터 19x19cm의 소품까지. 그러나 그림들 사이엔 동일한 호흡이 흐른다. 작가가 붓을 든 순간의 정신 상태가 화면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예술이 언어가 되는 자리
김레이시는 현재 창작과 함께 예술 교육의 확장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스스로 언어 이전의 상태를 그리는 작가가, 타인에게 그 언어를 건네는 일.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예술의 본질과 맞닿는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것도 같은 결에서다. 예술이 누군가와 연결되는 언어라면, 그 언어는 선택된 소수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닿아야 한다. 작품 판매 수익은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지는 상호부조 기금이 된다. 동료의 창작이 계속될 수 있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