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화의 가장 오래된 모티프는 농경입니다. 신학철의 〈모내기〉(1987)에서 시작된 동시대 농경 회화의 흐름을 김준권의 채묵목판, 민정기의 양평 들녘, 이철수의 한지 판화, 정영신의 오일장 사진으로 따라갑니다.
농경·노동의 한국 미술 — 김준권의 산, 민정기의 들녘, 이철수의 흙
흙과 손. 모내기와 추수. 산과 들녘. 한국 회화의 가장 오래된 모티프는 농경입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시작해 1980년대 신학철의 〈모내기〉, 1990년대 이후 민정기·이철수가 양평·제천에서 다시 잡아든 농촌의 시간, 그리고 동시대 김준권의 채묵목판과 정영신의 오일장 사진까지 — 농경과 노동의 미술은 멈추지 않고 흘러왔습니다.
이 글은 씨앗페 2026 출품작 가운데 농경·노동을 다룬 작품들을 묶어 한국 동시대 농경 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큐레이션입니다.
출발점 — 신학철 〈모내기〉(1987)
한국 동시대 농경 회화의 가장 큰 정전은 신학철의 〈모내기〉(1987)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두 농민이 모내기하는 모습을 가운데 두고, 외세와 분단·자본의 폭력이 화면을 둘러싸는 1987년 광주의 폭풍과 같은 화면. 이 작품은 발표 직후 국가보안법으로 압수당했고, 이후 한국 미술의 검열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점이 되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모내기〉가 열어준 자리, 즉 농경을 미술의 중심 모티프로 다시 가져온 그 흐름이 1990년대 이후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추적합니다.
1. 김준권 — 채묵목판, 산이 산처럼 서 있는 자리
김준권은 한국 채묵목판(彩墨木版) — 즉 색채와 먹을 함께 쓰는 목판화 — 의 정점에 서 있는 작가입니다. 충북 제천을 작업실 삼아 30년 동안 한국의 산을 새겨왔습니다.
〈산처럼〉(2021, 50x45cm)은 그 30년의 한 결입니다. 산이 산처럼 서 있다는 것 — 즉 풍경이 그저 풍경으로 거기 있다는 것이 농경 사회의 가장 깊은 평화입니다. 김준권의 산은 신학철의 〈모내기〉가 그렸던 격동의 화면 옆에 놓이는 또 다른 농경의 자리, '추수 후의 고요'입니다.
소나무는 한국 농경 마을의 입구에 서 있던 신령한 나무입니다. 김준권의 〈푸른 소나무〉(2023)는 단원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에 등장하는 그 소나무를 동시대 어법으로 다시 새깁니다. 농경이 사라진 도시에서, 소나무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 그 질문이 화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2. 민정기 — 양평의 들녘과 산수
민정기는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회원으로 한국 민중미술의 1세대입니다. 1990년대 이후 경기도 양평에 정착해, 도시의 격동을 떠나 농촌의 시간을 그려오고 있습니다. 민정기 작가의 입체적 프로필은 에서 다뤘습니다.
서후리는 양평군의 작은 마을이고, 〈서후리에서 - 벼베기〉(2025)는 작가가 자신이 사는 동네의 추수 풍경을 정면에서 잡은 한 점입니다. 신학철의 〈모내기〉가 농경을 시대의 알레고리로 그렸다면, 민정기의 벼베기는 그 알레고리가 가라앉은 뒤 남은 일상의 시간 — '실제로 거기서 벼를 베는 사람들의 시간'을 그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