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지만, 삶은 성별의 무게를 다르게 놓습니다. 육아·생계·창작의 삼각형 속에서 버텨온 여성 작가 5인의 좌담.
여성 작가 5인의 대화 — 육아·생계·창작의 삼각형
한국 예술계에서 "여성 작가의 삶"이라는 주제는 몇 년 전만 해도 공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거나,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졌습니다. 그러나 동료들 간에는 오랫동안 공유되어 온 구체적 현실이 있었습니다. 육아와 창작의 양립, 시장의 성별 편향, 임신·출산기의 경력 단절.
이 글은 씨앗페에 참여한 여성 작가 5인이 모여 나눈 좌담의 기록입니다. 직종도, 세대도, 가족 형태도 다른 5명이 2026년 봄의 한 오후에 모여 5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좌담은 실제 대화 녹취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내용입니다. 참여 작가의 요청에 따라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일부 세부 사항은 프라이버시를 위해 각색되었습니다.
참여자 소개
지영 (가명, 회화, 34세, 미혼) — 2020년 첫 개인전. 현재 서울 외곽 공동 작업실.
미선 (가명, 조각, 42세, 두 자녀) — 중견 작가. 레지던시 3회 경력.
연아 (가명, 드로잉·회화, 45세, 한 자녀) — 20년 경력. 최근 출산 이후 복귀 2년차.
해진 (가명, 판화, 56세, 자녀 독립) — 한국 판화계 중견. 30년 현역.
유미 (가명, 사진·영상, 29세, 미혼) — 신진. 최근 올해의 작가상 노미네이트.
세션 1. "여성이 작가가 된다는 것"
미선: 저는 대학원 다닐 때 이런 말을 정말 자주 들었어요.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두더라." 교수님도 선배도 그 말을 농담처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예언이었어요. 우리 동기 여성 중 지금까지 작업하는 사람이 3명뿐이에요.
해진: 우리 세대는 더 심했어요. 결혼하면 작업실을 없애는 게 '당연'했어요. 저는 결혼 후에 작업실을 유지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죠.
유미: 요즘은 그런 말이 공개적으로는 없어요. 하지만 구조는 남아있어요. 갤러리 기획전 5명 중 여성이 1명인 게 여전히 많죠. "우리는 성별 고려 안 해요"라고 하지만, 결과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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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 저는 작가 이름으로 '김지영'을 쓸지, 'Jiyoung Kim'을 쓸지 고민했어요. 한글로 여성 이름이 붙는 게 작품의 맥락을 좁힌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결국 한글을 썼지만, 그 고민 자체가 저를 한참 흔들었어요.
연아: 저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어요.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여성이라는 사실을 작품의 주제로 삼든, 배제하든 둘 다 선택이라는 거였어요. 그 선택을 제가 의식적으로 한 게 중요했어요.
세션 2. "임신·출산기의 공백"
연아: 저는 출산 후 2년을 완전히 쉬었어요. 그 공백이 이력서에 남는 게 두려웠어요. "왜 2023~2024년에 활동이 없으시죠?"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육아 때문에요"라고 하기가 이상하더라고요. 남자 작가는 그런 말 안 하잖아요.
미선: 저는 둘째 낳을 때 작업을 아예 못 했어요. 그 시기에 기획전 초대가 왔는데 거절했어요. 그 기획자가 지금은 연락이 없어요. 한 번의 거절이 장기적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는 거죠.
해진: 저는 그래서 출산 후 6개월 만에 작업실로 돌아갔어요. 아이를 엄마한테 맡기고요. 제가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이 10년을 갔어요. 그런데 그렇게 버텨서 지금 여기 있는 거예요.
유미: 저는 지금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경력 단절의 두려움이 정말 커요. 작가에게 2년의 공백은 되돌릴 수 없는 것 같아서요.
지영: 저도요. 지금 30대 중반인데, 결혼·출산·작가 활동을 동시에 하는 길이 잘 안 보여요. 저보다 몇 년 앞선 언니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고 판단하고 싶어서 오늘 여기 나왔어요.
연아: 제 경험으로는—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육아도, 작업도, 가사도 60%만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게 제가 살아남은 방법이에요.
세션 3. "시장의 성별 편향"
해진: 판화계에서 여성 거장은 손에 꼽아요. 30년 경력이 있어도 저보다 경력 짧은 남성 작가가 저보다 먼저 회고전을 열기도 해요.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미선: 조각은 더 심해요. "조각은 힘이 드는 일이라 여자한테는 어려운 매체"라는 말을 여전히 들어요. 저는 용접도 하고, 대형 돌도 다뤄요. 그런데 그게 마치 '특별한 일'로 취급돼요.
유미: 경매 기록을 봐도 분명해요. 같은 연령대 같은 장르에서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낙찰가가 차이 나요. 평가 체계 자체에 편향이 있어요.
지영: 저는 처음 갤러리에 작품을 보일 때, 갤러리스트가 "저희는 여성 작가 비중을 맞추려고 하는데 지금은 꽉 차 있어요"라고 했어요. '비중을 맞춘다'는 말이 '할당제'처럼 들렸어요. 제 작품 자체로 봐주기보다, 저를 '여성 작가 하나'로 카운트하는 느낌이었어요.
연아: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변화가 보여요. 2016년 이후로 페미니즘 담론이 확산되면서, 미술관·비엔날레의 여성 작가 비중이 실제로 늘었어요. 느리지만 움직이고 있어요.
해진: 저는 그 변화의 수혜자이기도 해요. 60세가 다 되어 기회가 오더라고요.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죠.
세션 4. "창작과 생계의 간극"
유미: 저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미술 학원 강사를 해요. 두 개를 하니까 작품 시간이 반이에요. 하지만 강사 일을 그만두면 월세를 못 내니까.
지영: 저도 디자인 외주를 병행해요. 외주 들어오면 작품 한 달 쉬고 외주 끝나면 다시 작품. 이 주기가 깨지는 게 제일 힘들어요.
미선: 저는 남편이 직장인이라 경제적 안정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양날의 칼이에요. 주변에서 "남편이 벌어주니까 작품 해도 되잖아"라는 말을 들어요. 제 작품이 취미 생활처럼 취급되는 거예요.
해진: 저는 판화 교실을 오래 운영했어요. 그게 제 안정적 수입원이자, 동시에 동료 여성 작가들을 발굴하는 창구이기도 했어요. 생계와 연대가 한자리에 있는 구조였죠.
연아: 저는 씨앗페 같은 상호부조 기금을 보면서 제 20대를 많이 생각해요. 그때 이런 게 있었다면, 저는 출산 후 2년을 그렇게 단절되지 않고 보냈을 거예요.
세션 5. "연대라는 단어에 대하여"
지영: 저는 '여성 작가 네트워크' 같은 모임에 처음엔 회의적이었어요. "성별로 묶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 번 참석하고 달라졌어요.
지영: 거기서 만난 선배 작가들이 구체적 정보를 공유해줬어요. 어느 갤러리가 여성 작가에게 불리한 계약을 하는지, 어느 레지던시는 육아 시설이 있는지, 어느 기관의 지원금이 출산 후 복귀 작가에게 우선권을 주는지. 이런 건 공식 채널에 없는 정보예요.
해진: 저는 평생 남성 동료가 많았어요. 여성끼리 뭉치는 건 '불편'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은 후회해요. 후배 여성 작가들에게 미리 길을 터주지 못한 게.
미선: 저는 최근 페미니즘 미술 담론이 너무 개인의 이야기로만 풀려가는 것에 약간 경계심이 있어요. 물론 개인 서사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조가 안 바뀌어요. 제도·시장·정책에 대한 요구도 함께 있어야 해요.
유미: 저는 저희 세대에게 페미니즘은 '선택'이 아니라 '공기'예요.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작업하게 돼요. 주제로 삼지 않더라도 그 영향이 있어요.
연아: 씨앗페 같은 캠페인이 우리에게 준 것은 '이것도 페미니즘의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에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동료의 월세를 지키는 일이 곧 연대의 실천인 거죠.
세션 6. "후배에게 해주고 싶은 말"
해진 (56세): 작업은 마라톤이에요. 20대에 잘 달린다고 이기는 거 아니에요. 60대까지 꾸준히 달리면 됩니다. 그러니까 20대·30대에 너무 자기를 몰아붙이지 마세요. 쉬어도 됩니다. 돌아올 수 있어요.
연아 (45세):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다만 결정을 경력의 공포 때문에 미루지 마세요. 공백은 메울 수 있어요. 메우는 법을 아는 선배가 있습니다. 도움을 청하세요.
미선 (42세): "나는 여성 작가가 아니라 작가다"라는 말이 이제는 가능해요. 그렇게 자기를 정의할 수 있게 해준 모든 앞 세대에게 감사하고, 그 흐름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기를 바라요.
유미 (29세):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또래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우리 같이 이야기해봐요. 혼자 판단하지 말고. 씨앗페 같은 네트워크가 있어서 저도 덜 외로워요.
지영 (34세):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5시간 동안 울 뻔했어요. 저 같은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대화가 끝난 뒤에도 저는 계속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좌담을 마치며
"여성 작가"라는 말은 단일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세대·지역·가족 형태·매체·경제 상황에 따라 다른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섯 사람이 5시간 동안 공유한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우리는 같은 구조 안에서 버텨왔다.
이 인식이 있기에 연대가 가능합니다. 씨앗페의 상호부조 기금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예술인 전체를 지원하지만, 여성 작가들이 자주 이 기금의 수혜자이자 기여자가 되는 이유는 이 공유된 구조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한 작가의 작업실 월세가 지켜지면, 그 작가가 다음 작품을 내놓을 수 있고, 그 작품이 다시 기금이 되어 또 다른 작가의 월세가 됩니다. 이 순환이 성별·세대·매체를 가로질러 연결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 좌담은 실제로 열렸나요?
A. 이 글은 씨앗페에 참여한 여러 여성 작가들의 실제 증언·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가상의 좌담 형식입니다. 인물명은 모두 가명이며 일부 세부 사항은 각색되었습니다. 실제 좌담 기획이 추진 중이며, 차후 실제 녹취 기반 후속 글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Q. 왜 여성 작가만의 좌담이 필요한가요?
A. 남성 작가 좌담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여성 작가들이 공유하는 고유한 구조적 경험—임신·출산·성별 편향·돌봄 노동—이 있고, 이 경험이 공적 담론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별도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남성 작가나 논바이너리 작가 대상 좌담도 차후 기획할 예정입니다.
Q. '여성 작가'라는 범주를 계속 쓰는 것이 오히려 경계를 강화하지 않나요?
A. 타당한 문제 제기입니다. 이 좌담에서도 "여성 작가가 아니라 작가로 불리고 싶다"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두 지점—정체성 인정과 정체성을 넘는 보편화—은 동시에 추구 가능하다고 봅니다. 현 시점에서는 여성 작가의 고유 경험을 기록하는 것과 그 경험을 넘어서는 담론을 만드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Q. 이 좌담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을 씨앗페에서 볼 수 있나요?
A. 참여 작가 5인 중 일부는 씨앗페 참여 작가입니다. 작품 갤러리에서 여성 작가 필터로 찾아볼 수 있으며, 작가별 프로필 페이지에서 이력과 작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Q. 다음 좌담은 언제 열리나요?
A. 씨앗페 공식 채널에서 안내됩니다. 청년 작가, 지방 작가, 육아기 작가, 은퇴기 작가 등 다양한 테마로 좌담을 이어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