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행위. 그것이 쌓여 숲이 되고, 요새가 된다. 프레카리아트를 자처하는 화가 윤겸이 불안 속에서 평온을 짓는 방법.
손이 움직인다.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선 하나. 그 옆에 또 하나. 그 옆에 또 하나. 선은 줄지어 붙고, 겹치고, 번진다. 어느 순간부터 선은 형상이 된다. 숲이 되고, 요새가 된다. 윤겸의 그림은 그렇게 태어난다.
선이 숲이 되는 방식
윤겸은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다. 이 행위가 그림을 만드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선을 그리는 행위는 세상을 불완전하게 볼 수 없는 나를 보여준다." 완벽하게 보지 못하면 그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선을 긋고 또 긋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을 불완전한 채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고백이다.
연작은 그 반복이 쌓여 탄생한 결과물이다. 안료가 층층이 올라가면서 캔버스 위에 초록의 밀도가 생긴다. 빛이 달라지면 숲의 질감도 달라진다. 같은 그림을 아침과 저녁에 다르게 보는 일. 그것이 윤겸의 의도다.
〈GreenForest〉 — 반복되는 선이 쌓여 하나의 숲이 된다
에서 초록은 더 짙어진다. 에는 형상이 스친다. 인물인지 식물인지 경계가 흐릿하다. 그 모호함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여기에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
'아스라이'는 우리말로 '희미하고 아득하게'라는 뜻이다.
〈아스라이〉 — 윤곽이 녹아들며 존재가 배경과 하나가 된다
와 에서 형상은 배경에 녹아든다. 경계를 붙잡으려 할수록 더 흐려진다. 이것이 아스라이라는 말이 가진 감촉이다. 선을 긋는 동안 윤겸은 스스로를 잊는다고 말한다. 무아(無我)라고 불러도 좋다. 그 상태에서 선은 가장 자유롭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그림을 찾는 방법이다.
요새를 짓는 사람
윤겸은 자신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 부른다. 불안정한 노동자. 확실한 소속도, 예측 가능한 수입도 없는 삶.
그런데 요새를 짓는다.
〈Serenity Fortress 평온의 요새〉 — 미완성이지만,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