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떠난 자리 — 1986년 7월에서 2026년 4월까지, 오윤이 우리에게 도착하는 길
마흔에 떠난 자리 — 1986년 7월에서 2026년 4월까지, 오윤이 우리에게 도착하는 길
작가를 만나다 · 2026-04-29 · 씨앗페 매거진
1986년 마흔에 떠난 작가. 10년 뒤 일곱 사람이 모여 그의 사후판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행했다. 작가가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가격이 매겨진 적 없던 판화에, 그가 떠난 자리에서 동료들이 표식을 새긴 셈이었다. 사후 40주기를 맞는 2026년, 그가 다시 도착한다. 오윤 사후판화 시장분석 시리즈 ①.
마흔에 떠난 자리
오윤 사후판화 시장분석 시리즈 ①
— 1986년 7월에서 2026년 4월까지, 오윤이 우리에게 도착하는 길
1986년 7월 5일, 오윤은 마흔 살에 죽었다.
그해 봄, 그는 마지막 개인전을 그림마당 민에서 열었다. 생애 첫 개인전이자 마지막 개인전이었다. 1980년대 한국 화단에서 마흔이라는 나이는 작가로서 막 자기 어법이 단단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가 남긴 것은, 그러니까, 한 작가가 본격적으로 펼치기 직전에 멈춰버린 작업의 단면이었다.
회화·판화·조각·드로잉을 합쳐 약 400여 점. 그가 직접 새긴 목판 원판은 약 180여 종. 「무호도」, 「칼노래」, 「춘무인추무의」, 「대지」 같은 도상들이 그 안에 있었다. 한국 미술사 어디에도 다시 나타나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상당수가 죽기 한 해 전인 1985년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 마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던 것처럼.
작가는 자기 판화에 에디션 번호를 매긴 적이 없었다. 누가 부탁하면 또 찍어주었고, 자신이 새긴 판을 파기한 적도 없었다. 판화는 그에게 회화와 다른 것이었다. 회화는 한 점뿐이지만, 판화는 무수히 복제해 나눌 수 있었다. 그 '나눌 수 있음'이 그에게는 1980년대 민중미술이 가진 반상업주의의 한 형태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판화에 가격을 매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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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동안, 오윤은 잊히지 않은 채로 잊혔다.
1990년대의 한국 미술시장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시대의 화두로 올라섰다. 1980년대 민중미술 진영의 정치적 동력은 빠르게 식었다. 한편 새로운 세대는 사진·비디오·설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다른 어법으로 옮겨갔다. 1995년에 첫 광주비엔날레가 열렸고, 한국 미술시장은 '국제화'라는 새 좌표를 좇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통째로 뒤덮었던 굵직한 도상들은 그 어느 흐름에도 속하지 않은 채 시장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왔다. 미술시장 자체가 얼어붙었다. 1차 시장이 형성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떠난 작가의 작품이, 2차 시장조차 멈춰 선 시기에 흐를 곳은 없었다.
오윤의 작품은 미술관 수장고와 몇몇 소장가의 집에 들어가 있었다. 거래는 거의 없었다. 살아남은 작품들은 그 시대를 함께 통과한 사람들의 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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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6월. 사후 10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그 여름의 일은 그해 2월 28일 한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일곱 사람이 모였다. 김윤수, 주재환, 최민, 성완경, 김정헌, 김용태, 우찬규. 오윤기념사업회라는 이름이었다. 그들이 그 자리에서 결정한 일은 분명했다. 작가가 자기 손으로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일을 그들이 대신했다 — 작가가 직접 새긴 목판으로 사후판화를 한 번 찍고, 처음으로 에디션 번호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그 결정에서 인쇄까지, 그리고 인쇄에서 전시까지가 그해 봄과 초여름의 일이었다. 결과물은 그해 6월 21일부터 7월 20일까지 학고재와 아트스페이스 서울에서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
그들의 결정은 단순한 한정판 발행이 아니었다. 국제 판화 시장이 오랫동안 써온 표식 체계를 그대로 들여왔다.
표식
영문
의미
ED
Edition
일반 판매용
AP
Artist's Proof
보존본
HC
Hors Commerce
비매품
TP
Trial Proof
시험 인쇄본
CP
Cancellation Proof
말소 증명본
어느 작품이 어느 자리에 속하는지가 종이 위 한 글자 두 글자로 분명해졌다.
누님 오숙희가 한 장 한 장에 직접 서명하기로 했다. 1941년생,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나온 분이었다. 도판 일부에는 우측 하단에 '1996년 — 오윤기념사업회'라는 주형 압인이 들어갔다. 모든 장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계획된 만큼 다 시행되지는 못한 자리들이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다섯 명의 작가가 직접 손으로 인쇄했다. 홍선웅, 유연복, 남궁산, 김윤기, 박야일. 작가의 동료들이었다. 도록 글은 일곱 사람이 나누어 썼다. 김지하, 심광현, 홍선웅, 성완경, 원동석, 유홍준, 허진무. 감수는 주재환이 맡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들은 마지막 한 가지를 하기로 했다. 다 찍은 판에 미세한 변형을 가한다. 다시는 어떤 판화도 이 판에서 나올 수 없도록. 변형된 판으로 한 번 더 찍어 그 사실을 종이 위에 남긴다 — 그것이 CP, Cancellation Proof였다. 발행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를 시각적 증거로 남기는 의례였다. 의도는 분명했고, 도판에 따라 그 마지막 단계까지 닿은 것도 있었다.
보도의뢰서에 그들이 직접 적은 문장이 있다. '더 이상의 프린트가 없을 것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한다.' 같은 자료의 마지막 단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 비로소 오윤의 예술은 완전한 종장을 맞았다.'
작가가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가격이 매겨진 적 없던 판화에, 그가 떠난 자리에서 동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표식을 새긴 셈이었다. 한국 근현대 작가의 사후 시장에서 이런 형태의 종결은 매우 드물었다. 박수근의 작품을 둘러싼 위작 분쟁이 한국 미술계의 오랜 상처였다는 것을, 그들 중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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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옥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죽은 지 19년 만이었다. 이듬해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윤 회고전이 열렸다. 「칼노래」 앞에서 머무는 사람들의 줄이 길었다. 1996년에 일곱 사람이 한 일이 그제야 미술계 바깥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두 사건이 한 작가의 미술사적 위치를 바꾸었다. 1980년대에 그가 '민중미술 진영의 한 작가'였다면, 2006년 이후 그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자리매김한 작가'로 옮겨갔다. 옮겨갔다는 것은 단지 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미술관 컬렉션의 우선순위, 학술 연구의 대상, 미술사 교과서의 항목 — 이 모든 영역에서 그의 자리가 다시 그려졌다는 뜻이다.
시장은 이 변화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따라간다. 회고전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난 뒤부터 경매에 그의 작품이 드물게 나오기 시작했다. 출품 빈도는 여전히 낮았다. 살아남은 작품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경매에 나올 때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시장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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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컬렉터가 바뀌기 시작했다.
1980년대를 살았던 컬렉터들 — 작품을 시대정신과 함께 받아들이고, 작가의 장례식 어디쯤 서 있었을지도 모를 사람들 — 의 손에서, 그들의 자식 세대로, 그리고 그들과 무관한 새로운 컬렉터층으로. 새 컬렉터들은 1980년대를 시간의 체험으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미술관에서, 도록에서, 학술 논문에서 오윤을 처음 만났다.
이 변화는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하지 않다. 시대 체험을 가진 컬렉터는 작품에 자기 청춘을 투영한다. 미술사적 좌표를 통해 진입한 컬렉터는 작품에 시간의 두께와 제도의 무게를 본다. 두 시선이 한 시장에서 만나면, 작품에 대한 수요는 좁아지지 않고 두꺼워진다. 한 층 위에 다른 층이 쌓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단색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폭발했다. 박서보의 작품이 홍콩 옥션에서 기록을 갈아치우는 동안, 한국 미술시장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조용히 돌았다. 단색화 다음은 무엇인가. 한국 모더니즘이 정점에 달한 다음, 글로벌 시장이 한국 미술에서 다음으로 발견할 카테고리는 무엇인가. 답은 합의된 적이 없지만, 한국의 '리얼리즘 계열'이라는 견해가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하나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결정이다. 2024년에 수집한 오윤 아카이브를 토대로, 2026년 8월 27일부터 2027년 2월 21일까지 6개월 동안 《오윤 컬렉션》 기획전이 열린다. 작가의 작품 세계와 창작 과정을 다시 들여다보는 자리이며,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의 예술관과 그가 미술의 역할을 어떻게 고민했는지를 살핀다. 작가의 작고 40주기를 맞은 한 해 동안 한국의 한 공공 미술기관이 6개월에 걸쳐 한 작가를 정면으로 다시 조명한다는 것 — 이런 일은 한 작가의 시장 사이클에서 결정적 변곡점이 된다.
다른 하나는 그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광진구 구의동의 어느 건물이 곧 헐린다. 옛 상업은행 지점 자리다. 건물이 팔렸고, 새 주인은 6월까지 그 건물을 철거할 예정이다. 문제는 그 건물 안쪽이다. 1974년 오윤이 만든 테라코타 벽화가 50년 동안 그 내부 벽에 박혀 있었다. 건물이 헐리면 벽화도 함께 부서진다. 종로4가 옛 상업은행 지점에 있는 자매작 「평화」와 함께, 오윤의 조각적 차원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공공 작품이다. 작가의 40주기를 맞는 해에, 그의 손이 닿은 또 하나의 작품이 멸실 위기에 놓였다. 이 벽화를 살리려는 노력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 부서질 것인가, 옮겨질 것인가.
한쪽에서는 한 공공 기관이 작가의 자취를 6개월에 걸쳐 다시 모아 보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같은 작가의 50년 된 작품 하나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시간 싸움이 있다. 작가가 떠난 지 40년이 되는 해에 이 두 가지가 한 화면에 놓이는 것은, 우연으로만 볼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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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다시 오윤이다.
진본 회화는 시장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작품 수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생전 판화 또한 마찬가지다. 작가가 살아 있을 때 찍은 부수가 많지 않았고, 남은 것들은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의 손에 머물러 있다. 컬렉터·기관·일반 애호가가 오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는 1996년에 단 한 번 발행된 사후판화다.
그 사후판화는 '차선'이 아니다. 작가가 직접 새긴 원판으로, 작가의 동료들이 손으로 인쇄해, 누님이 한 장 한 장 서명하고, 국제 판화 시장의 표준 등급 위에서, 단 한 번의 발행으로 종결된 작업이다. 한국 근현대 거장의 사후 시장 가운데 이런 형태로 닫힌 시장은 흔하지 않다. 박수근에게도, 이중섭에게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차이가 30년이 지나는 동안 어떤 의미로 자라났는지 — 이 시리즈는 그것을 따라가려고 한다.
시리즈 안내
이 글은 〈오윤 사후판화 시장분석〉 시리즈의 첫 편이다.
① 마흔에 떠난 자리(이 글) — 1986년 7월에서 2026년 4월까지, 한 작가의 미술사적 좌표가 어떻게 다시 그려졌는가.
② 30년 거래 데이터로 본 오윤 시장(예정) — 한국 양대 경매의 1996년 이후 거래 기록을 펼친다.
③ 사후판화의 정당성(예정) — 피카소·미로·무라카미가 만들어 온 국제 사례 위에서, 1996년 발행이 갖는 위치.
④ 박수근·이중섭·김환기와의 거리(예정) — 한국 근현대 거장들의 사후 시장에서 오윤만 다르게 작동하는 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