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Hak-chul has painted modern Korean history from collages of cut-out photographs. A guide to the long case of Rice Planting and to the four works by Shin Hak-chul at the Seed Art Festival, from a 1988 woodcut to a 2017 collage.
Korean original — English translation pending
신학철 — 오려 붙인 사진으로 한국현대사를 세운 화가

폭 90cm, 높이 227cm. 사람 키를 넘는 세로 화면이 검은 칼자국으로 빽빽합니다. 맨 위에는 소나무 가지가 지붕처럼 덮여 있고, 그 아래 둥근 테 안에 흰 옷을 입은 청년이 서 있습니다. 청년 아래로 사람들이 끌어안고, 얽히고, 밀려 올라옵니다. 화면 밑바닥은 불길처럼 말려 오르는 형상으로 끝납니다. 씨앗페에 나온 신학철의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1988)〉입니다.
신학철이라는 이름은 대개 두 가지와 함께 불립니다. 하나는 사진을 오려 붙여 역사를 그리는 방법, 다른 하나는 〈모내기〉라는 그림 한 점이 겪은 10년의 재판입니다. 이 글은 그 둘을 차례로 따라간 뒤, 씨앗페에 나온 네 점으로 돌아옵니다. 1988년의 목판, 1997년의 콜라주, 2002년의 유화, 2017년의 콜라주. 30년에 걸친 네 점이 한 작가가 쓰는 재료와 화면의 방향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김천에서 아방가르드협회까지
신학철은 1943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68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습니다. 서울경제(2016년 3월 2일)에 따르면 1학년 때 담임이 박서보였고, 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미국 팝아트를 접하면서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 붙이는 콜라주를 처음 시도했습니다.
출발은 민중미술이 아니라 실험미술이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설명에 따르면 그는 1970년부터 5년 동안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에서 활동했고, 1972년 《앙데팡당》,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 1981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월간미술 리뷰에서 이 시기의 작업을 "전구, 수저 (…) 등 일상적인 사물을 실로 감아서 캔버스에 이어 붙인 작업"으로 설명하며 〈부활 1〉(1979)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 있습니다.
같은 평론은 그 뒤의 길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1970년대 초반에는 AG에 참여했고, 70년대 후반에는 포토 콜라주를 실험했으며, 1980년을 넘기면서 〈한국근대사〉와 〈한국현대사〉 연작으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김종길은 1981년 작 〈변신 5〉와 〈한국근대사-3〉을 두고 "오리고 찢고 붙여서 표현하는 포토몽타주가 아니라 그림으로 콜라주하고 몽타주한 회화가 나타났다"고 썼습니다. 사진을 붙이던 손이, 붙인 사진을 보고 그리는 손으로 바뀐 순간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묵시 802〉(1980)가 그 문턱에 놓인 작품입니다. 구두 모양의 얼굴을 한 샐러리맨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는 화면으로, 일방적인 정보의 흐름과 억눌린 표현의 자유를 초현실적으로 비튼 작업입니다.
사진 한 권의 충격, 그리고 몽타주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설명은 그가 민중미술 쪽으로 본격적으로 옮겨 간 계기로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1978)을 우연히 접하고 느낀 충격을 꼽습니다. 작가도 굿모닝충청(2023년 3월 20일)과의 인터뷰에서 그 책을 기억했습니다.
"사진으로 본 한국백년에서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이 관동대지진이다." — 굿모닝충청, 2023년 3월 20일
40여 년 뒤인 2023년, 그는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을 그렸습니다.
1982년 서울미술관에서 연 첫 개인전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은 뒤 그는 민중미술 진영에 합류합니다. 방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서울경제는 이를 "다양한 매체에서 수집한 사진을 오려 붙인 '콜라주'를 밑그림 삼아 이를 포토리얼리즘으로 화폭에 옮기는 기법"이라고 설명합니다. 왜 굳이 사진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거 거짓말 아니다. 진짜다 사실이다'를 얘기하기 위해서 사진을 씁니다. '이것 봐라. 그때 찍은 사진이 있지 않느냐'라고 하는 셈이죠." — 서울경제, 2016년 3월 2일
재료는 역사 사진만이 아니었습니다. 김종길은 그가 "자본주의 욕망의 최전선을 달리는 화려한 '광고사진'으로 몽타주, 콜라주 미학을 실험했다"고 썼습니다. 기록 사진과 잡지 화보, 광고지가 한 화면에 같이 앉습니다.
2003년 마로니에미술관 회고전 때 작가가 중앙일보에 남긴 말 두 마디는 이 작가의 화면을 읽는 데 가장 쓸모가 있습니다. 하나는 화면의 방향에 관한 말입니다.
"역사적인 굵직한 사건들을 소재로 다룰 때는 그림이 위로 솟구쳤는데 서민들을 등장시키니까 화면이 저절로 옆으로 누웠다." — 중앙일보, 2003년 11월 18일
다른 하나는 그림의 쓸모에 관한 말입니다.
"나의 그림은 잡설이나 논설 또는 소설이다. (…) 다만 공격 목표를 향한 무기가 되었으면 할 뿐." — 중앙일보, 2003년 11월 18일
〈모내기〉

〈모내기〉(1987).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1987년, 신학철은 민족미술협의회의 통일전에 〈모내기〉를 냅니다. 한겨레(2017년 12월 29일)는 이 그림이 "통일의 염원을 담아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고 적었고, 연합뉴스(2024년 12월 12일)는 화면 하단에 "농부가 탱크와 코카콜라 등 쓰레기를 쟁기로 밀어내는 모습"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작가는 한국일보(2008년 5월 16일) 인터뷰에서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설명했습니다.
"화면 하단부에서 쓰레기를 쓸어내는 것부터 시작해 추수하기까지의 단계를 점점 올라가면서 그렸죠. (…) 그것은 어릴 때 우리 고향, 경북 김천을 생각한 거예요." — 한국일보, 2008년 5월 16일
1989년 민족미술협의회는 이 그림을 그해 달력의 7월 그림으로 썼고, 한 재야단체가 기금을 마련하려고 만든 부채에도 같은 도상이 실렸습니다. 서울시경 대공과가 작가를 연행하고 작품을 압수했습니다. 1989년 9월 검찰은 〈모내기〉를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보고 작가를 구속 기소했습니다. 작가는 서울구치소에서 3개월을 보낸 뒤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1심과 2심은 무죄였습니다.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환송했고, 1999년 8월 파기환송심은 징역 10월의 선고유예와 그림 몰수를 선고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한국일보의 표현대로 "재판절차는 10년이나 계속됐다". 2000년 8월 작가는 특별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림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001년 3월 서울지검은 〈모내기〉를 "사회적 이목을 끈 중대한 사건의 증거물"로 보고 영구보존을 결정했습니다. 2004년 3월 유엔 인권이사회가 작가에게 그림을 돌려주라고 권고했지만 법무부는 반환 불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2017년 12월 29일 박상기 법무부장관은 검찰이 보관해 온 그림을 국립현대미술관에 위탁 보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발표문에는 보관 장소와 방법이 적절하지 못해 작품이 일부 훼손된 상태라는 설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201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그림을 보관하고 있고, 작가에게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이런 일을 짐작했느냐는 물음에 작가는 "아니요"라고 답하며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전혀 의식도 없는데, 의식적으로 그린 게 아닌데 그렇게 되니까 억울하죠." — 한국일보, 2008년 5월 16일
수사당국이 그림을 남북 대비로 해석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황당했죠. 우습고." — 한국일보, 2008년 5월 16일
원작은 전시할 수 없습니다. 2024년 광주시립미술관 회고전에 걸린 〈모내기〉는 1993년 작가가 지인의 요청으로 원래 그림과 똑같이 다시 그린 작품입니다.
한국현대사, 그리고 5·18
한겨레 노형석 기자(2025년 3월)는 신학철의 광주 그림들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추적했습니다. 1980년대 한국현대사 연작을 시작할 때도 광주항쟁은 작품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계기는 민족미술인협회 정기 주제전 출품작을 구상하던 중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찍은 사진 모음을 우연히 본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1990년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가 나왔습니다. 그림 속 청년의 눈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합심해 계속 싸우자는 거죠." — 한겨레, 2025년 3월
작가는 그 뒤로도 희생자들의 사진을 수년 동안 분석했고, 1994년 유화 대작 〈한국현대사-초혼곡〉(247x123cm)을 내놓습니다. 동학혁명부터 항일독립투쟁, 4월 혁명을 거쳐 5·18까지 이어진 민중항쟁을 "꿈틀거리는 불길의 형상"으로 담은 그림입니다. 한겨레는 이 그림에서 작가가 누워 있는 희생자의 사진을 돌려 서 있는 모습으로 바꿨다고 설명합니다.
이 연작들은 작가의 농 섞인 표현대로 "징그럽고 끔찍한 그림"이라 사려는 사람이 없어 작업실에 10년 넘게 머물렀다가, 2010년에야 팔렸습니다.
한동안 작업이 끊긴 시기도 있었습니다. 서울경제(2016)는 그가 파킨슨병을 앓던 아내를 간병하느라 13년 넘게 그림을 접었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1991년 제1회 민족미술상, 1999년 제16회 금호미술상을 받았습니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 《민중미술 15년》, 2011년 리움 《코리안 랩소디》 등에 출품했고, 2003년 마로니에미술관에서 1960년대 대학 시절부터의 작품 120여 점을 모은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가장 큰 자리는 광주시립미술관 《신학철-시대의 몽타주, 60년 회고전》(2024년 12월 17일~2025년 3월 30일)이었습니다. 1960년대 실험미술부터 1980년대 민중미술, 최근작까지 90여 점이 걸렸고, 〈초혼곡〉과 〈모내기〉는 특별 섹션으로 따로 묶였습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넉 점 읽기
씨앗페에 나온 신학철의 작품은 넉 점입니다. 목판 한 점, 콜라주 두 점, 유화 한 점. 가장 이른 것이 1988년, 가장 늦은 것이 2017년입니다. 세 점이 흑백이고 한 점만 색이 있습니다. 가격은 ₩3,000,000부터 ₩25,000,000까지입니다.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1988)〉 — 1988년, 목판, 캔버스, 90x227cm
앞에서 옮긴 작가의 말 — 큰 사건을 다루면 그림이 위로 솟구친다 — 을 그대로 보여 주는 화면입니다. 폭의 두 배 반에 이르는 높이를 아래에서 위로 읽게 됩니다.
맨 아래에는 불꽃처럼 말린 형상이 띠를 이루고, 그 위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두 눈을 크게 뜬 얼굴 하나가 그 군상 속에서 튀어나옵니다. 조금 올라가면 굵은 밧줄 같은 매듭이 화면을 가로로 묶고, 그 매듭 위에 여인들의 얼굴이 모여 있습니다. 화면 한가운데는 검은 덩어리가 가로지르고, 그 위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안습니다. 안전모를 쓴 사람의 얼굴도 보입니다. 그 위 좌우로 모자를 쓴 노인들과 아낙들의 얼굴이 둘러서 있고, 정점에 둥근 테가 있습니다. 테 둘레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흰 옷의 청년이 정면을 보고 서 있습니다. 청년의 머리 위를 소나무 가지가 덮습니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칼자국이 세로로 이어집니다.
같은 제목의 1988년 목판화는 서울시립미술관과 전남도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2018년 말 한국민예총 창립 30주년 전시 《민족예술, 다시 날아오르다》에도 걸렸습니다. 서울경제(2019년 1월 1일)는 이 목판화를 두고 신학철이 "하나 되기를 주장하면서도 분열된 현실을 꼬집었"다고 썼습니다.

- 90x227cm · 목판, 캔버스 · 1988 · ₩25,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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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 1997년, 콜라주, 35.5x24cm
넉 점 중 가장 작은 화면입니다. 검은 바탕 위에 흑백 인쇄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습니다. 강한 조명을 받은 사람의 등과 어깨가 화면 가운데를 차지하고, 근육의 굴곡을 따라 빛이 번들거립니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둥근 유리 렌즈 같은 물체가 박혀 있습니다. 가까이 보면 인쇄 망점이 드러나, 이것이 인쇄물에서 오려 온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과 렌즈의 경계가 매끄럽게 이어져 어디서 어디까지가 붙인 것인지 쉽게 가려지지 않습니다. 옅은 나무 액자에 흰 여백을 두고 끼워져 있습니다.
신학철의 대작들은 콜라주를 밑그림으로 삼아 그린 회화입니다. 이 작품은 그림으로 옮기기 전의 단계, 곧 오려 붙인 이미지 자체를 보여 줍니다. 신학철의 작업을 처음 들이려는 분께 가장 부담이 적은 선택지이기도 합니다.

- 35.5x24cm · 콜라주 · 1997 · ₩3,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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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 2002년, 유채 캔버스, 53x45.5cm
넉 점 가운데 유일한 컬러 유화이고,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동네 골목을 그린 그림입니다. 화면 왼쪽에 과일 손수레가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 상인이 과일을 집어 건네고, 흰 줄무늬 스웨터에 꽃무늬 바지를 입고 검은 봉지를 든 손님이 그 앞에 서 있습니다. 수레 위 노란 팻말에는 사과 일곱 개에 천 원이라는 값이 적혀 있습니다. 수레 아래에는 상자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길 안쪽으로는 단발머리 여자 둘과 양복 입은 남자 하나가 등을 보이며 걸어갑니다. 왼쪽 건물에는 아치형 문이 있고, 멀리 전봇대와 건물들이 뿌옇게 흐려지며 그 너머로 뾰족한 첨탑 하나가 보입니다. 연한 하늘색과 분홍, 크림색이 화면 전체를 덮어 오후의 흐린 빛처럼 가라앉아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2002"라는 숫자와 서명이 붓으로 적혀 있습니다.
서민들을 등장시키면 화면이 저절로 옆으로 눕는다는 작가의 말이 이 작은 가로 화면에서도 맞아떨어집니다. 몽타주의 충돌 대신 한 장면이 조용히 이어집니다. 사과 일곱 개에 천 원이라는 값이 적힌 골목의 한 순간을, 거대한 역사화를 그리던 같은 손이 그렸습니다.

- 53x45.5cm · 유채 캔버스 · 2002 · ₩2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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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민주주의 만세(5.18)〉 — 2017년, 콜라주, 53.6x77.8cm
검은 바탕 한가운데 흑백 사진 조각들이 세로로 쌓여 하나의 기둥을 이룹니다. 맨 위에는 등을 보인 인물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습니다. 등에는 소총이 비스듬히 걸려 있고, 바지 옆선에 줄무늬가 있습니다. 그 아래에서 윗옷을 벗은 청년이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립니다. 청년의 눈은 검은 띠 같은 것에 가려져 있고, 몸에는 얼룩이 번져 있습니다. 청년의 가슴께를 둥근 원통 같은 형상이 좌우로 가로질러 날개처럼 뻗고,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진은 구겨지고 찢긴 조각들로 흩어지며 바닥에서 부스러집니다.
사람들이 아래에서 위로 겹겹이 서 있다는 점에서, 한겨레가 전한 〈초혼곡〉의 방식 — 누워 있는 희생자를 일으켜 세운 구상 — 과 같은 방향을 향하는 화면입니다. 제목의 '만세'가 가리키는 대로 인물들은 모두 팔을 위로 뻗고 있습니다. 1990년 광주 사진 모음에서 시작된 5·18이라는 주제가 2017년의 콜라주에도 제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 53.6x77.8cm · 콜라주 · 2017 · ₩12,000,000
- 작품 페이지 →
넉 점을 나란히 놓으면 이 작가가 쓰는 두 가지 방향이 모두 보입니다. 위로 솟구치는 〈유월항쟁도〉와 〈민주주의 만세(5.18)〉, 옆으로 누운 〈골목길〉. 그리고 그 모든 화면의 출발점인 오려 붙인 사진 한 장, 〈무제〉. 신학철 작가 페이지에서 네 작품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서의 자리
신학철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드물게 두 진영을 모두 거친 작가입니다. 1970년대에는 AG의 실험미술 안에 있었고, 1980년대에는 민중미술의 대표 작가가 됐습니다. 한겨레 노형석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모더니즘 진영에서 "비판적 리얼리즘 진영으로 자리를 바꿔"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자리를 바꾸면서도 도구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실험미술 시절에 익힌 '붙이는' 방법이 민중미술의 역사화를 만드는 방법이 됐습니다.
그래서 신학철의 역사화는 상상으로 그린 장면이 아니라 사진들의 몽타주입니다. 사진은 증거로 들어오고, 붓은 그 증거들을 하나의 거대한 형상으로 엮습니다. "이것 봐라. 그때 찍은 사진이 있지 않느냐"는 말은 그 방법의 요약입니다.
〈모내기〉 사건은 그 이력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고향 마을을 무릉도원으로 그린 그림 한 점이 10년의 재판을 거쳐 증거물로 영구보존됐고, 지금도 작가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일보는 2008년 그를 두고 "표현의 자유와 검열 논란을 일으킨 '모내기'의 작가"라고 소개했습니다. 연합뉴스는 2024년 회고전 소식에서 그를 "국내 민중·현대미술의 원로대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신학철의 넉 점은 씨앗페 온라인 갤러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1988)〉는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의 온라인관에도 걸려 있습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을 함께 지나온 오윤의 판화 곁에, 같은 시대의 칼자국으로 새긴 목판 한 점이 놓인 셈입니다.
신학철을 처음 만나는 분이라면 순서를 이렇게 잡아 보시길 권합니다. 먼저 〈무제〉를 보십시오. 인쇄 사진 한 장을 오려 붙인 작은 화면이 이 작가의 모든 작업의 출발점입니다. 다음으로 〈유월항쟁도〉를 아래에서 위로 읽으십시오. 붙인 이미지들이 어떻게 하나의 기둥으로 솟구치는지가 보입니다. 이어서 〈민주주의 만세(5.18)〉에서 그 방식이 30년 뒤에도 이어지는 것을 확인하시고, 마지막으로 〈골목길〉 앞에 서 보십시오. 사과 일곱 개에 천 원이라고 적힌 팻말 앞에서, 역사를 그리던 화가가 한 골목의 오후를 어떻게 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그림은 잡설이나 논설 또는 소설이다."
작가의 말입니다. 씨앗페에 나온 네 점은 그 잡설과 논설과 소설의 서로 다른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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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신학철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43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민중미술 화가입니다. 1968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70년부터 5년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에서 실험미술을 했습니다. 1980년대 초부터 사진을 오려 붙인 콜라주를 밑그림 삼아 그리는 〈한국근대사〉·〈한국현대사〉 연작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그려 왔습니다.
Q. 〈모내기〉 사건은 무엇인가요? A. 1987년 민족미술협의회 통일전에 출품한 〈모내기〉가 1989년 달력과 재야단체의 부채에 쓰인 뒤, 서울시경 대공과가 작가를 연행하고 작품을 압수한 사건입니다. 검찰은 1989년 9월 이 그림을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보고 작가를 구속 기소했습니다. 1·2심은 무죄였으나 대법원 파기환송 뒤 1999년 8월 파기환송심이 징역 10월 선고유예와 그림 몰수를 선고했고, 같은 해 11월 확정됐습니다. 작가는 2000년 8월 특별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림은 201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위탁 보관하고 있으며 작가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Q. 신학철의 작업 방식은 어떤가요? A. 여러 매체에서 모은 사진을 오려 붙여 콜라주를 만들고, 그것을 밑그림 삼아 사진처럼 생생한 사실주의 화풍으로 화폭에 옮깁니다. 작가는 사진을 쓰는 이유를 "'이거 거짓말 아니다. 진짜다 사실이다'를 얘기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서울경제, 2016년 3월 2일).
Q. 주요 수상과 전시는? A. 1991년 제1회 민족미술상, 1999년 제16회 금호미술상을 받았습니다. 1982년 서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2003년 마로니에미술관 회고전, 2024년 12월 17일~2025년 3월 30일 광주시립미술관 《신학철-시대의 몽타주, 60년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신학철 작품은 몇 점이고 어떤 것인가요? A. 넉 점입니다. 〈한국현대사-유월항쟁도(1988)〉(1988, 목판, 캔버스, 90x227cm, ₩25,000,000), 〈무제〉(1997, 콜라주, 35.5x24cm, ₩3,000,000), 〈골목길〉(2002, 유채 캔버스, 53x45.5cm, ₩20,000,000), 〈한국현대사-민주주의 만세(5.18)〉(2017, 콜라주, 53.6x77.8cm, ₩12,000,000). 작가 페이지에서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Q. 〈유월항쟁도〉는 어느 전시에 걸려 있나요? A. 씨앗페 온라인 갤러리와 함께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의 온라인관에도 걸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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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d Art Festiva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