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새김에서 각인으로:
1946—1986, 오윤의 궤적
OH YOON: THE PRINTS
칼끝으로 시대를 새긴 목판화. 사십 년 만에, 화면이 아니라 종이 위에서 만납니다.

공식 포스터
포스터 4종
흑백 작업 사진부터 영문판까지, 이번 전시의 공식 포스터 네 가지입니다.

1946 — 1986
오윤은 누구인가

194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갯마을』을 쓴 소설가 오영수, 외가는 동래 학춤을 이어온 집안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 김기조는 이름난 춤꾼이었고 외삼촌 김희영은 동래 학춤 예능보유자였습니다.
문학과 춤에 둘러싸여 자란 아이는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첫 걸음부터 막혔습니다. 1969년 김지하 등과 현실 동인을 만들어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선언했지만, 학교와 보안당국의 제지로 전시는 열리지 못했습니다.
1970 — 1980
십 년의 침묵
1970년 대학을 졸업한 뒤 오윤은 화실 대신 공장으로 갔습니다. 경주와 일산의 전돌공장에서 흙을 만지며 신라 때부터 내려온 기술을 익혔습니다. 흙을 다루고 돌을 깎던 그 시간이 그의 조형 언어가 됐습니다.
십 년 동안 그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 이르는 긴 잠복이었습니다. 오윤은 그 시간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


판화라는 선택
왜 판화였나
오윤에게 판화는 기법이 아니라 철학이었습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 대신 필요한 만큼 찍어내는 판화를 골랐습니다. 찍어낸 수만큼 소통의 길이 넓어진다고 봤습니다. 미술이 소수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판화 시장은 형성되지 않았고 판화를 상품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오윤의 작품에는 에디션 번호조차 없습니다. 번호를 매겨 희소성을 높이기보다 더 많이 찍고 더 많이 나눠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은 오윤이 판화에 몰두하며 "이것은 문화 게릴라"라고 웃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미술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야 한다
그가 선 자리는 미술관이 아니었습니다. 1978년 이오덕이 엮은 『일하는 아이들』의 표지가 그의 판화였습니다. 시집 표지였고, 노동 현장의 전단지였고, 거리의 포스터였습니다.

판화 속의 사람들
무엇을 새겼나
목판화의 간결한 선묘와 투박한 칼 맛은 보는 사람에게 곧장 가 닿았습니다.
판화 속에서 만나는 이들은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 한 많은 세월에 가슴앓이가 깊어진 얼굴들입니다. 장을 보러 가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호미를 치켜든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안고, 일을 마친 몸이 웅크린 채 쉽니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오윤을 두고 박수근의 서민 미술과 신동엽의 참여문학, 그 두 가치가 분리되지 않은 진짜 민중미술가라고 했습니다. 성완경은 오윤의 예술이 1980년대 민중미술이라는 틀 안에만 가두기 어려운 성취라고 평했습니다.



전시장 밖에서
거리로 나간 판화
오윤의 판화는 전시장 액자 안에서만 살지 않았습니다. 1984년 풀빛 출판사가 펴낸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 그 초판 표지가 오윤의 판화였습니다. 삼십 년 뒤 개정판이 나올 때 주요 일간지들이 일제히 초판 표지의 판화를 다시 언급했을 만큼, 그 그림은 시집의 얼굴로 남았습니다.
한두 번의 외도가 아니었습니다. 사후에 묶인 전집에는 판화·유화·조소와 나란히 '책표지'가 독립된 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벽에 거는 그림만큼이나, 책과 함께 팔리고 읽히는 그림이 오윤 작품 세계의 한 갈래였습니다.
값싸게 찍혀 책에 실리고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는 그림. 미술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야 한다는 오윤의 내기는 미술관 밖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후배 판화가들이 이어 1980년대 판화 운동이 되었습니다. 오윤에게는 같은 제목의 판화 〈노동의 새벽〉(1984)도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주로 목판화를 제작하여 배포함으로써 민중미술의 목판화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84, 진도
진도에서 배운 춤
1983년 간경화 진단을 받았습니다. 1984년 가을 건강이 다시 나빠지자 전라남도 진도로 요양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상여 행렬을 보았고 씻김굿을 만났습니다. 판소리와 육자배기를 들었고 북춤을 배웠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자리에서 신명을 배웠습니다.
진도에서 돌아온 뒤 오윤의 판화에 춤추는 몸이 쏟아져 나옵니다. 칼을 쥐고 뛰어오르는 사람, 춤추는 호랑이, 북을 치는 사람, 소리꾼. 한과 그늘에서 흥이 솟아나는 그림이었습니다.
한과 그늘과 귀곡성에서마저도 흥과 신바람이 터져 나오는 오윤 예술의 정점은 어디일까. 봄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1986
칼노래, 처음이자 마지막
1986년 5월, 오윤은 서울 그림마당 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전시 제목은 《칼노래》였습니다. 칼을 움켜쥔 채 왼발을 번쩍 들어올린 그 판화가 전시의 표제작이자 같은 해 나온 판화집의 제목이었습니다.
마지막 시기에 그는 이 전시에 걸 40점을 쏟아냈습니다. 유홍준에 따르면 그것은 그의 목판화 전체의 절반에 이르는 양이었습니다. 몸이 무너져 가는 동안 손은 더 빨라졌습니다.
두 달 뒤 부산에서 판화전이 열렸습니다. 오프닝에서 케이크를 자르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7월 5일,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40주기
사십 년 뒤, 바람으로
장례식에서 시인 정희성은 추모시를 읽었습니다.
오윤이 죽었다 야속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는 바람처럼 살았으니까 언제고 바람으로 다시 올 것이다
사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오윤의 판화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되었고 경매에서 값이 치솟았습니다. 오윤은 미술평론가 윤범모의 말대로 "80년대 미술운동의 상징적 미술가"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작고 40주기인 올해는 서울시립미술관 미술아카이브도 그의 작품 세계와 창작 과정을 조명하는 기획전을 마련했습니다. 오윤은 지금 한국 미술이 다시 꺼내 읽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기록과 전시가 늘수록 그의 판화를 도판과 화면으로만 만나는 일도 흔해졌습니다.
목판화는 인쇄물로 옮겨지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잃습니다. 칼이 지나간 깊이, 종이에 눌린 자국, 먹이 번진 결입니다.
이 전시는 그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 놓는 자리입니다. 화면이 아니라 종이 위에서 오윤이 칼로 새긴 시대를 직접 마주합니다.
미술은 많은 사람이 나누어야 한다고 오윤은 말했습니다. 사십 년 뒤 저희가 이 전시를 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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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0원8,000원
2026년 9월 10일까지 얼리버드 가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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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취학 아동은 예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호자와 함께 오시면 무료로 입장하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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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안내
오시는 길
- 장소
- 동덕아트갤러리
- 관람 시간
- 10:00–18:00 · 9월 25일·26일 추석 휴관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68 동덕빌딩 B1
오윤, 더 깊이 만나기
40주기를 맞은 오윤의 작품과 이야기, 그리고 씨앗페가 잇는 연대의 지면들.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출품작
총 110 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