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예술을 지킵니다
10명 중 8명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합니다
354건
누적 대출로 동료를 지원했습니다
95%
상환율 — 신뢰가 순환합니다
~1.4억 원
고금리 대비 절감된 이자
다음 전시까지, 다음 공연까지. 예술인에게 소득 공백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물감 한 통, 캔버스 한 장, 작업실 월세를 위해 고금리 대출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동료 예술인에게, 이 작품의 수익은 씨앗기금이 되어 공정한 금융의 손을 내밀어줍니다.
동료 예술인의 목소리
“아이들 모르게 나만 3일을 굶었던 기억.”
— 50대, 연극인
“돈이 없어 절박했던 치과 치료를 못 받고 있어요. 병원을 제때 가야 하는데, 안 가고 웬만하면 참는 것이 이젠 습관이 돼버렸습니다.”
— 50대, 배우
“돈이 없어서 귀 치료를 계속 미뤘고, 그로 인해 양쪽 귀 다 증상이 악화됐습니다.”
— 30대, 음악인
“병원에 입원 중이신 어머니의 병원비를 낼 수 없어, 퇴원을 미루기도, 받아야 할 검사와 치료를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 50대, 배우/방송인
“임대료 연체로 인해 단체 사업장이자 거주지에서 비자발적으로 퇴거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금융권은 물론 예술인 대출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 50대, 배우
“경제적 형편의 문제로 갈 곳이 없어 고시원, 연습실 등을 전전하다 한동안 노숙을 한 적이 있습니다.”
— 30대, 음악인
“하루 4시간도 채 못 자며 알바와 연극을 병행하지만, 공연을 할수록 빚만 늘어가는 상황이 계속되어 공연을 그만두기로 함.”
— 30대, 배우
“작품보다 매달의 금전적 해결을 우선순위로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아쉽습니다. 예술인으로서 큰 수익을 내려면 작품이 잘 돼야 하는데, 작품보다 매달 소일거리 찾기에 집중해야 함이 악순환 속에 갇혀있는 느낌이 듭니다.”
— 40대, 음악인
“당장의 매달 닥쳐오는 대출금으로 인해 공연을 접고 알바에 집중한 적이 많음.”
— 50대, 배우
“독촉 전화로 연습과 공연에 지장을 주고, 이로 인해 심리적 부담감과 압박이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하고 다음날이 두려워짐.”
— 40대, 연극인
“돈이 없으면 삶이 무너지는데 예술 창작은 꿈도 못 꾸죠.”
— 50대, 예술가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면서 드는 그 치욕감과 인연 단절, 그리고 갚지 못하면서 밀려오는 압박감, 무력감.”
— 50대, 만화가/미술가
“힘들 때는 친한 지인의 경조사에 참석할 수도 없을 정도였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조차 단절된 적이 있다.”
— 50대, 배우/방송인
“서민을 위한 제도임에도 예술인이라는 이유로 증빙이 부족할 때 자괴감을 느낍니다.”
— 30대, 영화/방송인
“연극배우라고 하자 '무직자'라고 대출담당으로부터 들었던 것.”
— 50대, 배우
지금까지 94점의 작품이 판매되어 연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작품 한 점이 동료 작가의 창작을 살려내는 산소가 됩니다.
판매 수익 전액은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으로 귀속됩니다.
비탈에서
박재동
작가 소개
박재동 — 한국 시사만화의 대부 박재동(朴在東, 1952년 12월 20일 ~ )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만화가이자 예술교육자로, 1974년 만화계에 등단했다. 울산 범서읍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 부산으로 이주한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만화방에서 만화를 실컷 보며 자랐다. 천시받던 만화방 아들이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하여 가난한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겼고, 긴 방황 끝에 시사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79년부터 휘문고와 중경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만평 〈한겨레그림판〉을 8년간 연재했다. 80~90년대 날카로운 풍자와 비평으로 국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며 한국 시사만화의 대가로 불리게 되었고, "한국의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세간의 평을 얻었다. 1984년에는 민중미술의 효시인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참가하여 오윤, 임옥상, 김정헌, 강요배 등 동시대 중요 작가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정치 풍자를 넘어 민중의 삶과 사회적 발언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1996년에는 애니메이션 회사 '오돌또기'를 설립하여 MBC 뉴스데스크의 〈박재동의 TV만평〉을 제작하는 등 만화와 영상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웹툰 작가 강풀은 박재동의 만평을 보고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으며, 영화 〈26년〉 속 5·18 애니메이션 장면도 오돌또기가 제작하는 등 한국 만화·영상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권력이 대중을 억압하면 할수록 만화가들의 작품은 그만큼 더 치열하고 강력해진다"는 그의 말은 작가 정신을 잘 보여준다. 만화의 사회적 역할을 넓힌 공로로 제10회 고바우만화상, 제4회 민주언론상, 제1회 한겨레상을 수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쓴 그는, "미술에 정답은 없다, 지금 당장 만화가라고 생각하고 만화를 그리라"는 교육 철학으로 수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주요 저서로는 『손바닥 아트』, 『인생만화』,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1·2』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