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옷을 그려온 판화가 방인희. 체취와 얼룩으로 남은 삶의 흔적을 콜라그래피로 새겨온 그가, 오윤의 판화에 보내는 오마주와 함께 씨앗페에 두 점을 냈습니다.
방인희 — 옷에 새겨진 기억, 오윤에게 보내는 답장

옷 하나가 허공에 걸려 있습니다. 몸은 없고 옷만 남았는데, 옷깃 두 장이 서로 여며진 자리만은 또렷합니다. 방인희의 〈섭을 갖추다〉, 2026년, 디지털프린트 위에 꼴라그래피, 28x34cm. 은회색으로 가라앉은 화면 위에 연둣빛 셔츠 한 벌이 굵고 거친 검은 선으로 둘려 있고, 그 선이 가장 힘주어 지나가는 자리가 바로 목 아래 여밈, '섭'입니다.
방인희는 20년 넘게 옷을 그려온 판화가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벗어 놓은 옷을, 몸이 아니라 몸이 남기고 간 흔적을 화면에 옮겨 왔습니다. 그런 그가 2026년, 오윤의 판화에 보내는 오마주 한 점과 자신의 오랜 주제인 스웨터 한 점을 나란히 씨앗페에 내놓았습니다. 이 글은 옷을 그리는 사람이 왜, 어떻게 그 두 점에 이르렀는지를 따라갑니다.
옷이라는 소재를 찾기까지
방인희는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일반대학원 판화과에서 석사를, 미술학과 'Multiple Art & Technology' 과정에서 박사과정을 밟았습니다. 오픈갤러리와의 작가 인터뷰에서 그는 작업의 출발점을 이렇게 짚었습니다.
"성신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 오픈갤러리 작가 인터뷰
2001년 첫 개인전을 연 뒤 꾸준히 작업을 이어 왔고, 2016년에는 갤러리그림손에서 열 번째 개인전 '발췌된 장면'(흔적과 기억을 통한 사유)을 열었습니다. 그사이 2014년에는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타인의 기억들이 생성하는 이미지》를 열었고, 그 밖에 표갤러리·아트사이드·관훈갤러리·설미재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여덟 차례 더 치렀습니다.
그가 옷이라는 소재에 붙잡힌 이유는 소재 그 자체의 성질에 있습니다. 오픈갤러리 인터뷰에서 그는 작업의 지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삶의 흔적과 기억을 통한 사유, 최근에는 인간의 욕망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 오픈갤러리 작가 인터뷰
그리고 2016년 갤러리그림손 개인전을 앞두고 CNB뉴스와 나눈 인터뷰에서는 옷이라는 사물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옷은 물질과 기억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생성하는, 혹은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발화되는 장치가 된다." — CNB뉴스, 김금영 기자, 2016년 9월 19일
옷은 그저 몸을 가리는 물건이 아니라, 입고 벗기를 반복한 시간이 새겨지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같은 개인전에서 그는 명화 속 여성 이미지(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부그로의 〈오로라〉 일부)를 옷의 형상과 합성한 '그녀의 기억' 연작을 선보이며, 인터넷을 떠도는 이미지의 '주인 없음'을 옷의 '주인 없음'에 포개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이미지를 차용하는데, 이것은 디지털 시대에서 소유자가 없는 이미지이며 떠돌아다니는, 증식하는 이미지들이다. 주인 없는 옷은 미디어의 진화와 디지털 프린트의 정체성의 문제들에서 '주인 없음'을 뜻한다." — CNB뉴스, 김금영 기자, 2016년 9월 19일
디지털 에칭 — 사진과 판화 사이
방인희의 작업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말은 '디지털 에칭(Digital Etching)'입니다. 2024년 갤러리끼 《아트경기 런 페스티벌》을 취재한 핸드메이커 기사는 이 기법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스웨터나 옷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찍고 디지털콜라주 과정을 거친 후에 유화지 위에 출력한다. 이때 단순히 이미지를 디지털로 바꾸는 것이 아닌 '디지털 에칭(Digital Etching)'을 시도한다. '디지털 에칭'이란 작가의 시그니처로 동판에 송진 가루를 올려 부식하는 전통적인 부식 방법과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2024년 10월 30일
사진으로 옷을 기록하고, 디지털로 합성하고, 유화지에 출력한 뒤, 다시 그 위에 사물을 직접 붙여 찍어내는 볼록판화 기법인 콜라그래피(Collagraphy)를 더합니다. 기계로 뽑아낸 매끈한 이미지 위에 손으로 눌러 찍은 물성이 겹치는 순서입니다. 같은 기사는 이 과정이 만들어내는 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공기를 떠도는 입자들은 어떠한 기억이거나 냄새가 되고, 마치 동판이 부식되는 과정을 통해 판에 새겨지듯 옷 이미지와 어우러져 작가의 기억 속 한 페이지로 각인된다." —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2024년 10월 30일
이 기법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방인희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으로 꼽는 것은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인 2004년에 만든 'skirt and sweater'입니다.
"'skirt and sweater'라는 작품으로 2004년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 공간국제판화 비엔날레라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입었던 옷을 드로잉하여 전통판화 기법으로 찍어낸 작품으로 수상의 이력도 있지만 초기작업세계를 뚜렷이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애착이 갑니다." — 오픈갤러리 작가 인터뷰
그해 그는 제13회 서울 공간 국제판화비엔날레(서울시립미술관·공간사 공동주최)에서 이 작품으로 'HANGRAS PRIZE'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스웨터는 그러니까 방인희에게 새로 등장한 소재가 아닙니다. 2004년의 졸업작품에서 2026년의 씨앗페 출품작까지, 22년을 가로질러 같은 옷이 다시 등장하는 셈입니다.
몸이 빠져나간 자리들
2010년대 이후 방인희는 옷과 여성의 욕망을 겹쳐 읽는 방향으로 작업을 넓혔습니다. 아트경기(경기문화재단) 작가 소개는 그의 화면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방인희는 옷과 기억을 병치시킨 이미지를 통해 여성의 삶과 욕망을 '기록'한다. 작가에게 옷은 삶의 연장(instrument)이자 확장(extension)이다. 초기작에서 포착되는 옷과 관련된 기억, 몸과 옷의 관계, 옷에 묻은 얼룩과 주름 등은 오랫동안 사용된 사물에 기인된 흔적으로 감정의 변화를 유발한다."
2014년 진천군립 생거판화미술관의 소장작품전 '날, 앞에 서다'를 소개한 중부포커스 기사도 비슷한 문장으로 그의 작업을 요약합니다.
"방인희 작가는 옷은 인간의 삶 속에서 수많은 의미를 갖는다. 작가는 이러한 옷이 한 사람에게 선택 되어진 순간부터 그 소유주의 삶과 함께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고 가정하고, 이를 시간성과 함께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 중부포커스, 윤정미 기자, 2014년 12월
몸은 화면에 없습니다. 대신 옷이, 옷에 남은 얼룩과 주름과 늘어짐이 몸을 대신 증언합니다. 오픈갤러리 인터뷰에서 그는 초기 영감의 원천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초기 작업에서는 오래입어 낡고 허름한 몸을 기억하는 흔적을 담은 옷들을 보면 영감을 얻습니다. 근래의 작업에서는 신화속이미지와 유명 여배우의 드레스를 보며 여성의 욕망을 표현하였는데 인터넷을 떠도는 드레스를 보면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 오픈갤러리 작가 인터뷰
그리고 앞으로 그리고 싶은 것도 말합니다. 어머니의 옷입니다.
"미발표 작품 중에는 어머니의 옷(1970년대~1980년대)을 소재로 한 몇 점의 드로잉이 있습니다. 이 작업을 발전시켜서 어머니와 나, 딸을 이어가는 새로운 작업으로 발전하고 싶은 욕심도 듭니다." — 오픈갤러리 작가 인터뷰
옷을 입었던 사람에서, 옷을 물려준 사람으로. 방인희가 그려 온 흔적의 계보는 한 세대씩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력이 말해주는 것들
방인희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2008, 2018)에 소장됐고, 2021년에는 '푸른기억' 시리즈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소장됐습니다. 인천문화재단(2012), 서울시립미술관, 진천 생거판화미술관, 중국 운남성 곤명미술관, 일본 사이타마 미술관, 대만 관두미술관에도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수상과 선정 이력도 20년 넘게 이어집니다. 2004년 제13회 서울 공간 국제판화비엔날레 'HANGRAS PRIZE' 우수상, 2004년 제8회 BELT선정작가, 2004년 제24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 공모전 특선, 2005년 제27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뉴 스타트 부문' 지원 선정, 2007년 성신판화상(선정심사: 미술사가 김철효), 2010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품창작발표활동' 지원 선정, 2014년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 시각예술 부문 선정, 2016년 서울문화재단 시각예술 부문 지원 선정, 2021년과 2024년 경기문화재단 아트경기 선정작가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이력이 말해주는 것은 화려한 스타 작가의 궤적이 아닙니다. 개인전과 단체전을 거르지 않고 채워 온 성실함, 그리고 판화라는 매체 안에서 디지털과 전통 기법을 함께 다루며 여러 지원사업과 공모전 선정을 거듭해 온 한 작가의 생업의 리듬입니다.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판화과에서 2016년, 2022년, 2023년, 2024년 강의를 맡기도 했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두 점 읽기
방인희가 씨앗페에 낸 작품은 두 점입니다. 하나는 오윤의 판화에 보내는 오마주, 다른 하나는 그가 오래 다뤄 온 옷의 연작입니다. 재료도 갈립니다. 앞의 것은 디지털프린트 위에 꼴라그래피, 뒤의 것은 종이위에 콜라그래피입니다.
〈섭을 갖추다〉 — 2026년, 디지털프린트 위에 꼴라그래피, 28x34cm
이 작품은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에 오마주작으로 걸린 작품입니다. 작가는 작품 설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번 작업은 오윤의 그 강렬한 '칼맛'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나만의 현대적 판화 기법으로 되살려내는 오마주의 여정이다." — 작가노트, 씨앗페 출품작 설명
기계적이고 매끄러운 디지털 프린트 위에, 오윤의 판화가 가졌던 거칠고 굵은 선을 꼴라그래피로 얹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화면을 보면 이 말 그대로입니다. 은회색으로 가라앉은 배경 위에 셔츠 한 벌이 걸려 있고, 옷깃과 앞섶을 그은 검은 선은 붓이 아니라 칼로 그은 듯 굵고 곧고 거칩니다. 목덜미 위로는 옷걸이의 갈고리 같은 선 하나가 비스듬히 솟아 있어, 이 옷이 누군가의 몸에 입혀진 것이 아니라 걸려 있는 옷, 주인을 기다리는 옷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배경에는 희미한 원형의 얼룩과 세로로 그은 가는 스크래치들이 겹쳐 있어, 디지털 프린트의 매끄러움 위에도 판화 특유의 물성이 남아 있습니다.
작가는 이 옷깃의 여밈, 즉 전통 한복에서 앞자락을 덧대 몸을 지켜주는 '섭'을 오윤이 자식을 품은 어버이의 몸짓에 견줍니다.
"옷의 앞자락에 덧대어 옷깃을 여미게 해주는 전통의 '섭'은, 찬 바람과 시련으로부터 몸을 온전히 지켜주는 따뜻한 여밈의 구조다. 오윤이 자식을 품에 안은 어버이의 몸짓으로 당대의 상처를 감싸 안았듯이, 나의 화면 속 '섭을 갖춘 옷'은 고단한 생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싸매주는 안식이자 위로의 상징이다." — 작가노트, 씨앗페 출품작 설명

- 28x34cm · 디지털프린트 위에 꼴라그래피 · ₩500,000
- 작품 페이지 →
몸을 빼고 옷만 남긴 뒤, 그 옷에 새겨진 선과 얼룩으로 누군가의 삶을 증언하는 것 — 〈섭을 갖추다〉가 하는 일도 그것입니다. 다만 이번에 남긴 옷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윤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방인희가 씨앗페에 작품을 낸 이유는 그의 작업이 20년 넘게 해 온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늘 옷을 통해 다른 사람의 흔적을 대신 짊어져 왔습니다. 명화 속 여인의 옷을, 오래 입어 허름해진 옷을, 이제는 어머니의 옷까지. 〈섭을 갖추다〉에서 그는 그 옷을 오윤에게 건넸습니다. 오윤의 판화가 지녔던 '칼맛'을 자신의 판 위에 되살리고, 그가 어버이의 몸짓으로 감싸 안았던 상처를 '섭'이라는 여밈의 구조로 다시 옮겼습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닌 다른 예술가의 이야기를, 자신의 가장 오래된 기법으로 이어받아 다시 새긴 것입니다.
방인희를 처음 만나는 분이라면 〈섭을 갖추다〉의 검은 선부터 보십시오. 매끄러운 디지털 프린트 위에 일부러 거칠게 얹은 선이, 오윤의 '칼맛'에 보내는 답장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방인희 작가 페이지에서 그의 작품을 보실 수 있고, 〈섭을 갖추다〉가 걸린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에서는 그와 함께 오윤에게 오마주를 보낸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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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방인희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판화과에서 석사, 미술학과 'Multiple Art & Technology' 과정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판화가입니다. 2001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옷'을 소재로 삶의 흔적과 기억을 새기는 작업을 20년 넘게 이어 왔습니다.
Q. '디지털 에칭'이 무엇인가요? A. 방인희의 시그니처 기법입니다. 옷을 사진으로 찍어 디지털콜라주 과정을 거친 뒤 유화지 위에 출력하고, 그 위에 사물을 직접 붙여 찍어내는 볼록판화 기법인 콜라그래피를 더합니다. 동판에 송진 가루를 올려 부식하는 전통 판화 기법과 비슷한 효과를 디지털 공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핸드메이커, 2024년 10월 30일).
Q. 왜 옷을 소재로 삼았나요? A. 작가는 옷을 "물질과 기억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생성하는, 혹은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발화되는 장치"(CNB뉴스, 2016년 9월 19일)로 정의합니다. 몸은 화면에서 빼고, 옷에 남은 얼룩과 주름으로 그 옷을 입었던 사람의 삶과 시간을 증언하는 방식입니다.
Q. 소장처와 주요 수상은? A.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2008, 2018)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2021, '푸른기억' 시리즈), 서울시립미술관, 인천문화재단, 중국 운남성 곤명미술관, 일본 사이타마 미술관, 대만 관두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2004년 서울 공간 국제판화비엔날레 'HANGRAS PRIZE' 우수상, 2007년 성신판화상, 2005년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 등을 수상·선정됐습니다.
Q. 씨앗페에 낸 〈섭을 갖추다〉는 어떤 작품인가요? A. 오윤의 판화가 지녔던 '칼맛'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자신의 현대판화 기법으로 되살린 오마주작입니다. 옷깃을 여미는 전통의 '섭'을, 오윤이 어버이의 몸짓으로 당대의 상처를 감싸 안았던 태도에 견주었습니다.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에 출품됐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방인희 작품은 몇 점이고 어떤 것인가요? A. 〈섭을 갖추다〉 한 점입니다. 2026년작, 디지털프린트 위에 꼴라그래피, 28x34cm. 작가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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