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아파트, 안양소년원의 아이들, 제주 4·3 유족의 유품. 서귀포에서 나 2022년 12월 세상을 떠난 故 고현주가 카메라를 든 자리를 따라가며, 씨앗페 온라인 갤러리에 올랐던 〈기억의 목소리〉를 읽습니다.
故 고현주 — 사물에 스민 기억, 붉은 저고리 한 벌을 찍은 사진가

붉은 저고리 한 벌이 화면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소매는 접히고 앞섶은 구겨졌고, 푸른 고름이 가슴께에서 매듭지어 묶여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없습니다. 저고리 둘레는 붉은 꽃송이가 빈틈없이 둘러쌌습니다. 꽃은 한 송이 한 송이가 노란 꽃술을 드러내고, 가장자리 어두운 바탕으로 갈수록 시들고 마른 잎과 섞여 흩어집니다. 가운데의 붉음과 둘레의 붉음이 거의 한 색이어서, 저고리는 꽃더미에 놓인 것인지 꽃더미에서 솟아난 것인지 잠깐 헷갈립니다. 푸른 고름만이 그 붉은 덩어리 속에서 홀로 다른 색입니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2022년 12월 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故 고현주. 마지막 몇 해를 제주 4·3 유족의 집에 전해 내려온 사물을 찍는 데 썼던 사진가입니다.
서귀포에서 음악 교사로, 그리고 사진가로
고현주는 1964년 서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제주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뒤 6년 동안 서귀포의 한 중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했고, 어릴 적부터 꿈꾸던 사진작가가 되려고 상명대 예술디자인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습니다. 첫 성과는 2002년에 나왔습니다. '재건축 아파트' 시리즈로 제5회 사진비평상을 받았습니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를 찍은 연작으로 사진가의 길에 들어선 셈입니다.
꿈꾸는 카메라, 열 해
2008년부터 고현주는 안양소년원 아이들에게 사진 찍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희망을 전하는 '꿈꾸는 카메라' 작업이었고, 그 결과를 모아 2012년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펴냈습니다. 소년원 아이들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과도 사진으로 삶의 희망을 나누는 이 프로젝트를 10여 년 이어 갔습니다.
제자 이현주 씨는 부고 기사에서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사진을 그저 아름다움이 아니라 촬영을 통해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고찰하는 기록이라고 강조하셨다" — 제자 이현주, 연합뉴스 2022년 12월 4일
찍는 일을 통해 제 삶을 돌아보게 한다는 이 생각은 뒤에 4·3의 사물들을 찍을 때의 태도와도 한 줄에 놓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담아내면서도 그 이야기를 가진 사람의 생애를 가운데에 두는 방식입니다.
2018년, 유품을 찍기 시작하다
2016년 고현주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8년부터 제주 4·3 사건 체험자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023년 유고전 소식을 전한 보도는 그가 5년여간 투병하며 제주 4·3의 아픈 기억을 사진에 담은 〈기억의 목소리〉 3부작을 발표했다고 전했습니다. 같은 보도에 따르면 고현주는 홀로 두 딸을 키우고 부모를 모시는 형편에 카메라 살 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카메라를 빌려 썼습니다.
작업의 방법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유족의 보따리와 궤에서 오래 켜켜이 쌓여 있던 물건들을 꺼내 앵글에 담았습니다. 경기신문은 이 작업의 취지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역사라는 이름 아래 왜곡되거나 소외됐던 개개인의 삶을 조명하고, 온전히 애도받지 못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물’이란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내고자 했다는 게 고현주 작가의 말이다." — 경기신문, 2021년 4월 14일
같은 기사는 그 사물들을 "더이상 이름 불리지 않는 것들, 끝내 쓸모없어진 것들"이지만 "‘가족의 유품’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여전히 피붙이처럼 남겨진 물건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작가 자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인의 서사가 낱낱이 새겨져 있는 사물은 그래서 중요하다... 모든 기록물 속에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 고현주, 아트코리아방송, 2021
사물을 찍으면서도 끝내 사람을 말하는 사진입니다. 씨앗페 갤러리 화면의 붉은 저고리가 몸 없이도 한 사람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기억의 목소리〉 연작
〈기억의 목소리〉는 세 번에 걸쳐 나왔습니다. 아트코리아방송은 두 번째 사진집을 소개하며 첫 번째가 20여 명의 4·3 유가족 유품 사진과 글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2019년에 사진집이 발간되었고, 2021년 1월에는 『기억의 목소리 II』가 나왔습니다. 이 두 번째 작업은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한 제주 여성이 간직한 보따리 속 사물들을 230쪽이 넘는 분량으로 풀어냈고, 안순실(1946년생) 유족의 증언이 함께 실렸습니다. 고현주는 이 보따리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시어머니-나에게로 전해진 몇 대를 거쳐 간직하고 있는 사물 안에서 한 제주 여성의 역사가 당당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고현주, 연합뉴스, 2021년 1월 26일
문학동네에서 허은실 시인의 글과 함께 펴낸 『기억의 목소리: 사물에 스민 제주 4·3 이야기』는 책 소개에서 "사진과 시, 인터뷰로 만나는 제주4.3 희생자의 삶"으로 소개되었습니다. 2021년 4월에는 류가헌 전시2관에서 사진전이 4월 20일부터 5월 2일까지 열렸고, 4월 24일에는 허은실 시인과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2020년에는 서울과 독일, 미국에서 전시와 세미나가 잡혀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고정희상, 그리고 마지막 작업
2021년 11월 (사)또하나의문화는 제8회 고정희상 선정위원회를 열고 개인상 수상자로 고현주를, 단체상 수상자로 '몸춤'을 선정했습니다. 여성신문은 수상 소식을 전하며 고현주가 소년원 아이들과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에게 사진으로 삶의 희망을 전하는 '꿈꾸는 카메라' 프로젝트를 10여 년간 해 왔다고 소개했습니다.
세 번째 작업 〈기억의 목소리 Ⅲ〉은 고현주가 생애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작업이 되었습니다. 2022년 12월 4일 오전 2시 50분께 제주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8세였고, 유족으로 두 딸이 있습니다. 이듬해 2023년 2월에는 진주 루시다 갤러리에서 〈기억의 목소리 Ⅲ〉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유고전, 4·3평화기념관에서
고현주가 생전에 바란 자리가 있었습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전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족과 제주4·3평화재단은 그 뜻에 따라 2023년 6월 23일부터 7월 31일까지 4·3평화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유고전을 열었습니다. 고현주의 사진 38점과 동생 고승욱 작가의 설치미술 11점이 나왔고, 고인이 4·3의 기억을 찍을 때 적어 둔 기록 노트도 사진으로 공개되었습니다. 6월 30일 개막에는 희생자 유품 기증식이 함께 열렸습니다.
지금 볼 수 있는 자리
씨앗페 온라인 갤러리에는 〈기억의 목소리〉 한 점이 올랐습니다.
- 101.6x27.9cm · Archival pigment print / Hahnemuhle William Turner (Edition 54/100) · 2021
- 작품 페이지 →
이 작품은 2026년 1월 23일 새 주인을 만났습니다. 씨앗페 온라인 갤러리 출품작의 판매 수익은 상호부조 기금으로 이어져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돌아갑니다. 붉은 저고리 사진은 이제 그 새 주인의 곁에 있습니다.
고현주 작가 페이지에서 작가 소개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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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고현주 작가는 어떤 사진가인가요? A. 1964년 서귀포에서 태어나 2022년 12월 4일 세상을 떠난 사진가입니다. '재건축 아파트' 시리즈로 2002년 제5회 사진비평상을 받았고, 2008년부터 안양소년원 아이들과 '꿈꾸는 카메라' 작업을 했으며, 2018년부터는 제주 4·3 유족의 유품을 찍은 〈기억의 목소리〉 3부작을 남겼습니다.
Q. 〈기억의 목소리〉는 어떤 작업인가요? A. 제주 4·3 유족이 간직해 온 유품과 사물을 사진으로 기록한 연작입니다. 작가는 개인의 서사가 새겨진 사물을 통해 온전히 애도받지 못한 이들을 위로하려 했다고 밝혔고, 문학동네에서 허은실 시인의 글과 함께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Q. 고정희상은 어떤 상인가요? A. (사)또하나의문화가 선정하는 상으로, 2021년 제8회 개인상을 고현주가 받았고 단체상은 '몸춤'이 받았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작품은 무엇인가요? A. 〈기억의 목소리〉(2021, Archival pigment print, 101.6x27.9cm, Edition 54/100) 한 점입니다. 이미 새 주인을 만났습니다.
Q. 유고전은 언제 어디서 열렸나요? A. 2023년 6월 23일부터 7월 31일까지 제주4·3평화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렸습니다. 사진 38점과 동생 고승욱 작가의 설치미술 11점, 작가의 기록 노트가 공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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