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관훈미술관 3인전으로 1980년대 형상미술의 한 축에 섰고, 기획자와 비평가로 오래 일한 뒤 2000년대에 인물화로 돌아온 화가 장경호. 해월 최시형의 얼굴을 담은 씨앗페 출품작을 함께 읽습니다.
장경호 — 형상미술의 한복판에서 얼굴로 돌아온 화가

씨앗페에 들어온 장경호의 작품은 한 점입니다. 〈해월 연구〉. 2025년, 판화지에 세리그라프, 16도 프린팅, 54x65cm.
제목에 '연구'가 붙어 있습니다. 완성작이 아니라 연구라는 뜻이 아니라, 한 얼굴을 여러 번 그려본 사람이 붙이는 제목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입니다.
장경호는 자신을 설치미술가로 소개합니다. 1980년대 형상미술의 한복판에서 그가 한 일이 그랬고, 지금도 회화와 설치를 오갑니다. 이 작가가 왜 100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의 얼굴을 계속 그리는지를 알려면, 그가 1980년대에 어디에 서 있었는지부터 보아야 합니다.
1984년, 관훈미술관의 세 사람
1984년, 서울 관훈미술관(현 관훈갤러리)에서 세 사람이 함께 전시를 열었습니다. 김진열, 장경호, 정복수.
이 3인전은 34년 뒤에 한 번 더 열립니다. 2018년 12월, 서울 종로구 나무화랑에서 《34년 만의 조우 또는 해후》라는 제목으로 세 작가가 다시 뭉쳤습니다. '중견작가 되돌아보기' 시리즈의 두 번째 자리였고, "세 작가가 1980년대 생생한 형상성을 선보인 후 30여 년간 이어온 작업"을 함께 볼 수 있는 전시였다고 동아일보는 전했습니다(2018년 12월 6일).
34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같은 세 사람이 다시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1984년의 그 전시가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줍니다. 한 번 지나가고 만 청년 전시였다면 34년 뒤에 되돌아볼 이유가 없습니다.
한강미술관과 형상미술
장경호가 선 자리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형상미술입니다.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의 학술지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49집에 실린 이윤수(홍익대학교)의 논문 「한강미술관과 1980년대 형상미술」은 그 자리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1984년 개관하여 1989년 폐관한 한강미술관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기획전 중심의 운영과 젊은 작가의 발굴·지원을 통해 형상미술의 실험과 확산에 기여했다는 것. 그리고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한 작가로 정복수, 김진열, 이흥덕과 함께 장경호를 꼽습니다.
논문이 정의하는 형상미술은 이렇습니다. 1980년대 한국 미술의 한 경향으로, 개인의 내면 심리와 사회적 격동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작가 특유의 개성을 담아 형상화한 미술. 이들은 "그로테스크하게 변형된 인체 형상, 일상과 사회 현실에 대한 우회적 표현 등으로 개인의 내면과 시대의 아픔을 드러내는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이 흐름이 놓인 위치입니다. 논문은 한강미술관의 형상미술이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로 나뉜 대립적 구도의 한국 미술계 속에서 주변화되었지만, 독자적이고 중층적인 제3의 대안적 미술을 실천하며 1980년대 한국 미술계에 역동성을 부여하였다"고 씁니다.
제3의 자리. 1980년대 한국 미술을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의 두 진영으로만 그리면 보이지 않는 자리가 있었고, 장경호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논문이 2025년에 나왔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할 만합니다. 40년이 지나서야 그 자리에 이름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관훈미술관장 시절 — 형상미술을 세상에 보이는 일
장경호가 이 흐름 안에서 한 일은 작품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관훈미술관장을 지내면서 한국현대 형상회화전을 지속적으로 열었습니다. 형상미술의 실체를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림으로 잘못된 세상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진정한 형상미술 작가"를 발굴하고자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방식이 드러납니다. 부정과 반성이 한 문장 안에 있습니다. 잘못된 세상을 부정하는 것과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을 따로 놓지 않았습니다. 바깥을 향한 비판이 곧 안을 향한 질문이어야 한다는 태도이고, 이것이 같은 시기 다른 흐름과 형상미술을 가르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한겨레는 2023년 기사에서 그의 이력을 짧게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작가는 80~90년대 기획자와 비평가로 활약하다 2000년대 이후 그림으로 관심을 돌려 인물화 작업에 천착해왔다."
두 줄입니다. 그런데 이 두 줄 안에 20년이 접혀 있습니다. 젊은 시절 형상미술의 한복판에 있던 화가가 이십 년 가까이 남의 전시를 열고 남의 작업에 글을 쓰다가, 다시 자기 화폭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얼굴로 돌아오다 — 《묵시》전
2023년 11월, 서울 인사문화거리 들머리의 관훈동 나무아트에서 장경호 초대전 《묵시》가 열렸습니다. 역사 속 위인과 민중의 얼굴을 담은 사진을 주관적 필력으로 옮겨 그린 2000년대 이후의 근작과 구작 10여 점을 모은 자리였습니다.
전시장에 걸린 얼굴들의 목록이 이 작가의 관심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김구(1876-1949).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 1948년 여순항쟁 때 좌익으로 몰려 체포된 한 남자. 그리고 순천, 고흥, 횡성, 영천 등지에서 궂은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의 고단한 지금 얼굴들.
위인과 이름 없는 사람이 같은 벽에 걸렸습니다. 독립지사와 종교 지도자와 체포된 남자와 시골 노인이 한 전시 안에 나란히 있다는 것은, 이 작가가 얼굴을 신분으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법도 한 방향입니다. 그는 인물사진을 아크릴 물감으로 옮기면서 대부분의 얼굴을 "장벽 같은 검회색 화폭과 대조된 구도"로 배치했습니다. 얼굴 뒤에 벽이 있습니다. 배경이 아니라 장벽입니다.
전시를 본 한겨레 기자는 김구를 담은 2012년작 〈묵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평생 투쟁하는 삶을 살았던 독립지사 김구 선생이 화폭의 검은 벽 너머에서 묵직한 시선을 보낸다. 그림 속 그는 선승처럼 눈을 가늘게 뜬 수행자의 인상이다." — 한겨레, 2023년 11월
투쟁한 사람을 그렸는데 수행자로 보인다는 관찰입니다. 같은 기사는 전시의 효과를 이렇게 맺습니다. "출품작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언제나 시대적 질곡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조건과 붓질을 한 작가의 내면을 반추하게 된다."
광장에서
2017년 초, 광화문광장.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2주일 남짓 앞둔 토요일이었습니다. 광장에 작품을 거는 작업을 하던 시민기자 정덕수에게 장경호가 둥글게 말린 무언가를 어깨에서 내려 건넸습니다.
"당신이라야 이 작품을 제대로 걸 수 있어서 내가 특별히 일찍 나왔어." — 오마이뉴스, 정덕수 시민기자 기고
받아든 것은 신학철의 〈한국근대사-금강〉이었습니다. 펼쳐 보니 폭 180cm에 길이 5m의 세로형 작품이었고, 현장에서 걸 수 있는 최대 높이는 3m였습니다. 각파이프를 덧대고 철판 조각으로 보강해 틀을 2m 높이는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기고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작업하는 모습을 장경호 화백께서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시더니 캔 음료 하나를 내미셨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과 그림을 걸 자리를 만드는 일을 그가 어떻게 한 덩어리로 여겼는지가 이 짧은 장면에 들어 있습니다. 앞서 본 관훈미술관장 시절과 같은 태도입니다.
동료를 기억하는 자리에도 그의 이름이 있습니다. 민중미술운동가 문영태의 3주기 첫 유작전을 기획한 추모위원회에는 신학철·조문호·홍선웅·박불똥·박건·김진하·양정애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올랐습니다(한겨레, 2018년).
다른 작가의 전시에 청중으로 앉는 자리에도 그가 있습니다. 강원도민일보는 춘천의 미술전시공간 명동집에서 열린 황효창 전시 《5월》의 아티스트 토크를 전하며, 그 모임에 신학철과 함께 장경호가 참석했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기사는 장경호가 그 전해에 신학철·박불똥과 3인전을 열었다는 사실도 함께 전합니다. 1984년에 세 사람으로 시작한 이 작가의 이력에는 3인전이라는 형식이 유독 자주 등장합니다. 혼자 걸지 않고 곁을 두고 거는 방식입니다.
출품작 읽기 — 〈해월 연구〉
2025년, 판화지에 세리그라프·16도 프린팅, 54x65cm
검은 바탕 한가운데에 노인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흰 수염이 턱에서 가슴께까지 내려오고, 정수리 쪽은 희끗하게 밝습니다. 눈두덩과 눈 밑이 짙은 청회색으로 눌려 있어 시선이 정면보다 조금 아래를 향한 듯 보입니다. 얼굴 전체가 흰색과 청회색만으로 쌓여 있어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럼에도 주름과 눈매가 또렷합니다.
이 단색 화면에서 단 하나의 색이 이마 위에 놓입니다. 분홍빛 덩어리. 꽃잎이 번진 것처럼도 보이고 도장을 눌러 찍은 자국처럼도 보이는 이 자국이 얼굴의 가장 밝은 자리에 얹혀 있습니다. 화면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색이 하필 이마 위에, 머리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형상이 흐트러집니다. 수염 끝과 옷깃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물감이 줄줄이 흘러내린 자국이 세로로 길게 남아 있습니다. 세리그라프는 판마다 색을 얹어 겹치는 기법인데, 이 작품은 16도, 즉 열여섯 번 색을 올린 결과입니다. 그 열여섯 겹이 얼굴의 위쪽에서는 단단한 형태로 뭉치고 아래쪽에서는 흘러내리며 풀립니다.
배경은 완전한 검정입니다. 인물의 윤곽을 따라 검정이 바짝 다가와 있어서 얼굴이 어둠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보입니다. 앞 장에서 본 "장벽 같은 검회색 화폭과 대조된 구도"가 여기서도 그대로 작동합니다.
《묵시》전을 전한 기사가 밝혔듯 장경호의 인물화는 사진을 옮기는 데서 출발합니다. 옮기면서 그가 하는 일은 배경을 지우고, 색을 걷어내고, 형태를 아래쪽에서 흘러내리게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면에서는 이마 위에 분홍 한 점을 남겼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에 붙인 글은 정작 해월을 말하지 않습니다. 재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재회는 다시 새롭게 반죽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반죽은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눈빛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예술적 태도로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일관성으로 다시금 깨어나게 될 것이다. 예술이 사회적으로 몇 층의 하이러라키를 만들어 내면서 레벨화 하고 가치의 울타리를 만들고 귀족과 서민을 만들어내는 사이에도 우리는 그 밑바닥에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예술적 시선과 동지적 마인드와 우정과 순수의 가치를 잃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이 최후의 가치이고, 최종적 성과이며, 이것이 영원할 것으로 믿는 덜떨어진 마음의 표현이다. 재회는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 작가의 글
'다시 새롭게 반죽한다.' 오래된 사진을 다시 화면으로 옮기는 일에 그가 붙인 말입니다. 그리고 예술이 층과 등급과 울타리를 만드는 동안에도 밑바닥에서 지켜야 할 것으로 '동지적 마인드와 우정과 순수'를 꼽습니다. 34년 만에 다시 모인 3인전, 광장에서 남의 그림을 걸어주던 토요일, 동료의 유작전을 준비하던 추모위원회가 이 문장 아래에 나란히 놓입니다.

- 54x65cm · 판화지에 세리그라프, 16도 프린팅 · 2025 · ₩1,100,000
- 작품 페이지 →
54x65cm의 세로 화면입니다. 인물 하나가 정면으로 걸리는 그림이라 서재나 복도 끝처럼 마주 보게 되는 자리에 어울립니다. 검은 배경이 넓어 밝은 벽에 걸면 화면이 그 자리에서 깊이 파인 것처럼 보입니다.
미술사에서의 자리
장경호를 한국 미술사에 놓는 일은 2025년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앞서 본 「한강미술관과 1980년대 형상미술」이 그 작업의 한 결과입니다. 논문은 한강미술관과 형상미술이 "다양한 미술 경향이 공존하고 충돌하던 1980년대 한국 미술의 역동성을 복원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맺습니다.
복원이라는 말이 쓰인 이유가 있습니다. 한동안 1980년대 한국 미술은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라는 두 항으로 서술되어 왔고, 그 구도에 들어맞지 않는 작업들은 서술에서 빠졌습니다. 형상미술이 그렇습니다. 사회 현실을 다루되 구호로 가지 않고, 인체를 변형하되 형식 실험에 머무르지 않은 작업들이 어느 쪽 목록에도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장경호의 경우 그 사정이 한 겹 더합니다. 그는 1980년대 형상미술의 한복판에 있었고, 이어 20년 가까이 기획자와 비평가로 일했습니다. 남의 전시를 여는 사람은 자기 연보가 늦게 쌓입니다. 2000년대 이후의 인물화 작업이 《묵시》 같은 전시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이 비교적 최근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 작가를 읽는 순서는 거꾸로 잡는 편이 낫습니다. 먼저 지금의 얼굴 그림을 보고, 그다음에 1984년의 3인전과 한강미술관을 보는 것입니다. 해월의 얼굴에서 배경이 왜 장벽인지, 왜 색을 거의 다 걷어냈는지를 알려면 그가 어떤 미술을 옹호하며 전시를 열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장경호가 씨앗페에 작품을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작가의 글 가운데 한 대목이 이 자리와 겹칩니다. "예술이 사회적으로 몇 층의 하이러라키를 만들어 내면서 레벨화 하고 가치의 울타리를 만들고 귀족과 서민을 만들어내는 사이에도." 예술 안에 층이 생기는 것을 문제로 본 사람이 동료를 위한 자리에 한 점을 내놓았습니다. 따로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해월 연구〉를 컬렉션에 들인다는 것은, 130년 전 사람의 얼굴 하나를 벽에 두는 일입니다. 그 얼굴에 남은 유일한 색이 이마 위의 분홍 한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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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장경호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80년대 초 형상미술을 주도한 작가입니다. 시대적 위기에 맞서 인간과 삶의 문제를 풀어가던 우리 미술의 한 축이 형상미술이었고, 그는 관훈미술관장 시절부터 한국현대 형상회화전을 지속적으로 열며 형상미술의 실체를 대중에게 보여주려 했습니다. 1984년 관훈미술관에서 김진열·정복수와 3인전을 열었고, 2018년 나무화랑에서 《34년 만의 조우 또는 해후》로 세 사람이 다시 모였습니다.
Q. 형상미술이 무엇인가요? A. 1980년대 한국 미술의 한 경향으로, 개인의 내면 심리와 사회적 격동기라는 시대 상황을 작가 특유의 개성으로 형상화한 미술입니다. 이윤수의 논문 「한강미술관과 1980년대 형상미술」(『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49집, 2025)은 1984년 개관해 1989년 폐관한 한강미술관을 거점으로 정복수·김진열·이흥덕·장경호 등이 활동했으며, 이들의 작업이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대립 구도 속에서 주변화되었으나 "제3의 대안적 미술"을 실천했다고 평가합니다.
Q. 2000년대 이후에는 어떤 작업을 하나요? A. 인물화입니다. 한겨레는 "80~90년대 기획자와 비평가로 활약하다 2000년대 이후 그림으로 관심을 돌려 인물화 작업에 천착해왔다"고 전했습니다(2023년 11월). 2023년 서울 관훈동 나무아트에서 열린 초대전 《묵시》에는 김구,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1948년 여순항쟁 때 체포된 한 남자, 순천·고흥·횡성·영천 등지 어르신들의 얼굴을 그린 작품 10여 점이 나왔습니다.
Q. 〈해월 연구〉의 '해월'은 누구인가요? A.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입니다. 장경호는 《묵시》전에서도 최시형의 얼굴을 그린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Q. 세리그라프 16도 프린팅이란? A. 세리그라프는 실크스크린 판화를 가리킵니다. 색마다 판을 따로 만들어 겹쳐 찍는 방식이고, '16도'는 열여섯 번 색을 올려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해월 연구〉는 판화지에 이 방식으로 찍은 2025년 작품입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장경호 작품은 무엇인가요? A. 〈해월 연구〉(2025, 판화지에 세리그라프·16도 프린팅, 54x65cm) 한 점입니다. 가격은 ₩1,100,000입니다. 작가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Q. 장경호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장경호는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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