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의 도면 복사 기법이었던 시아노타입으로, 사람의 손에 의해 사라져 가는 숲과 돌을 인화하는 작가 김경진. 빛에 바래기 쉬운 매체를 일부러 고른 이유부터 씨앗페 출품작 두 점까지 따라 읽습니다.
김경진 — 청사진의 푸른빛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붙든다

화면 전체가 파랗습니다. 물감의 파랑이 아니라 인화지가 햇빛을 받아 스스로 물든 파랑입니다. 그 짙은 감청 위로 돌들이 흰 얼룩처럼 떠올라 있습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고, 어떤 것은 둥글고 어떤 것은 모서리가 깨져 있습니다.
이 파랑에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작가가 고른 기법이 내주는 색이 이 색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색을 고르는 대신 공정을 고른 셈이고, 그래서 두 점 모두 같은 파랑 안에서 농도와 번짐만 달라집니다.
김경진이 씨앗페에 낸 두 점은 모두 이 푸른빛으로 되어 있습니다. 매체 표기는 '종이에 시아노타입', '종이에 시아노타입 프린트'. 캔버스도 물감도 없습니다. 그 대신 이 작업에는 빛과 시간이 들어갑니다.
청사진이라는 지지체
시아노타입이 무엇인지는 작가 본인의 설명이 가장 정확합니다.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에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이 푸른 빛들의 작업은 '시아노타입'이라는 산업화시대의 청사진 기법을 사용한 사진 인화 프로세스 연구의 결과작이다."
작업의 성격을 규정하는 단어가 '연구'라는 점도 지나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작품이 아니라 "프로세스 연구의 결과작"이라고 씁니다. 완성된 이미지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공정을 계속 시험하고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을 내놓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화면마다 파랑의 농도와 번짐의 정도가 다른 것도 그래서입니다.
산업화 시대의 청사진. 설계도를 복사하던 방법입니다. 예술을 위해 고안된 기법이 아니라, 도면을 여러 장 찍어내기 위해 쓰이던 실용 기술이었습니다. 그것을 작품의 지지체로 삼는다는 것은 재료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태도를 고르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정하기 전에, 무엇으로 남길 것인가를 먼저 정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작가는 그 대가를 숨기지 않고 작업의 뜻으로 삼습니다.
"이 빛 바래기 쉬운 작업들은 그 존재로 '사라져 가고 있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는 이 방법으로 인간에 의해 사라지고 있는 크고도 작은 것들을 담아왔다."
한 문장 안에 두 겹이 겹쳐 있습니다. 작품이 담는 것도 사라지는 중이고, 작품 자체도 사라지는 중입니다.
빛에 바래기 쉬운 매체로 사라지는 것을 찍습니다. 그림이 대상을 오래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대상과 같은 속도로 희미해지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사진이 보통 하는 일 — 순간을 멈춰 세워 영구히 붙드는 일 — 과 반대 방향입니다. 여기서는 작품 자체가 시한을 가진 물건이 되고, 그 시한이 곧 메시지가 됩니다.
두 개의 지명 — 1112, 그리고 알작지왓
씨앗페에 들어온 두 점의 제목은 얼핏 암호처럼 보입니다. 〈1112_04〉와 〈공허의 돌_05〉. 둘 다 연작의 일련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앞의 숫자가 무엇인지는 작가가 밝혀 둡니다.
"1112 시리즈는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몸과 마음을 썼던 숲이자, 현재는 확장공사가 진행 중인 비자림로의 도로 번호이다." —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숲의 이름 대신 도로 번호를 제목으로 씁니다. 이 선택은 묘하게 정확합니다. 그 숲이 지금 무엇으로 취급되고 있는지를 제목이 그대로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행정의 언어로는 그곳이 1112번 도로이고, 확장 공사의 대상입니다. 작가는 그 언어를 그대로 가져와 제목에 올려놓았습니다.
〈공허의 돌〉의 출처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입니다.
"공허의 돌 시리즈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파괴되어 제 모습을 잃은 알작지왓의 돌들에서 채취한 것이다." —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채취'라는 말이 눈에 걸립니다. 그렸다고도, 찍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시아노타입이 대상을 인화지 위에 직접 얹어 빛을 쬐는 방식이라면, 화면에 남은 흰 형태는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무엇의 자국입니다. 채취라는 단어가 과장이 아니라 공정에 대한 설명인 셈입니다.
두 연작의 대상은 숲과 돌로 다르지만 문장의 구조는 같습니다. 사람이 지키려 했던 것, 그리고 사람의 필요에 의해 훼손된 것. 주어가 언제나 사람입니다.
풍경화가 보통 하는 일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풍경화는 대개 장소를 아름다운 상태로 옮겨 놓습니다.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제목이 먼저 장소의 행정적 처지를 알려 주고, 화면은 그 장소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보여 줍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숲을 감상하는 자리가 아니라, 없어지는 중인 것의 자국을 들여다보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완주에서의 '사라질 풍경'
이 문법은 씨앗페 바깥에서도 이어집니다. 2025년 여름, 김경진은 완주문화재단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완주예술방학-夏〉에 참여했습니다. 7월부터 9월까지 국내 예술가 4팀이 완주 곳곳을 다니며 지역의 역사·문화·자연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이었고, 결과 공유 전시는 9월 16일부터 28일까지 복합문화지구 누에아트홀 2전시실에서 열렸습니다.
"김경진 작가는 '사라질 풍경'을 주제로 한 시아노타입 프린트 작업을 구상하고, 완주 지역의 건축물과 생태를 관찰하며 글쓰기와 기록 작업을 병행했다." — JB포스트, 2025년 9월 17일 (전주일보·투데이안 같은 날 동일 내용 보도)
이 레지던시에 참여한 나머지 세 팀이 무엇을 했는지를 함께 보면 김경진이 맡은 자리가 더 또렷해집니다. 박세연은 봉동 지역 작가와 교류하며 누에 산업과 잠업의 역사를 리서치했고, 아롱다롱(김아롱·김다롱)은 전통시장 상인들을 인터뷰해 필름카메라와 유튜브 숏츠로 완주의 일상을 기록했으며, 위주리는 만경강을 중심으로 지역의 문화유산과 자연 공간을 조사했습니다. 산업사, 상인의 일상, 강. 그 사이에서 김경진이 고른 것은 '사라질 풍경'이었습니다.
'사라질 풍경'. 앞에서 읽은 작업 노트의 표현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비자림로에서, 알작지왓에서, 완주에서 — 장소는 계속 바뀌는데 주제어는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완주에서는 사진 작업에 글쓰기와 기록이 함께 붙었습니다. 사라질 것을 인화하는 일과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이 한 작업의 두 축으로 놓인 것입니다.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약력을 보면 최근 몇 해의 활동에도 이 매체가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2024년 생각하는 사진 게릴라전 〈시와 사진〉(가비앙), 2025년 인천 아트 마켓 페어 〈우리끼리 미술제〉(인천문화예술회관), 같은 해 완주문화재단 예술곳간 레지던시 성과 보고전 〈예술방학 展〉이 모두 시아노타입 작업으로 참여한 단체전입니다. 완주 보고전에는 사운드 설치가 함께 들어갔습니다. 2025년에는 원두서점 갤러리에서 회화와 사운드로 구성한 개인 초대전 〈그냥 좀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를 열었고, 2023년에는 퍼포먼스 프로젝트 〈사람의 원형〉에 참여했습니다. 평면 한 장으로만 작업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록을 순서대로 읽으면 한 가지가 눈에 띕니다. 시아노타입 작업이 사진전이 아니라 시와 함께(〈시와 사진〉), 아트 마켓의 공동 부스로(〈우리끼리 미술제〉), 사운드 설치와 함께(〈예술방학 展〉) 놓인다는 점입니다. 인화 한 장을 액자에 넣어 거는 방식보다, 그 푸른 종이를 다른 매체 옆에 놓아 함께 읽히게 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개인 초대전 〈그냥 좀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도 회화와 사운드로 구성됐습니다. 제목이 구호가 아니라 혼잣말에 가깝다는 점도 이 작가의 어조를 보여 줍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두 점은 그 활동에서 떨어져 나온 낱장입니다. 사운드도 퍼포먼스도 없이 종이 한 장으로 서 있지만, 그 한 장이 어떤 공정에서 나왔는지는 화면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두 점 읽기
두 점 모두 2024년작이고, 값은 같습니다. 고르는 기준은 값이 아니라 어느 연작의 이야기를 곁에 두고 싶은가입니다.
〈공허의 돌_05〉 — 2024년, 종이에 시아노타입 프린트, 26x38.5cm
짙은 감청 바탕 위에 흰 돌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위쪽 몇 개는 윤곽이 크고 뭉근하게 번져 있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작고 또렷한 조각들이 모여듭니다. 돌과 돌 사이로 잔가지 같은 흰 선이 갈라져 나갑니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인화 과정에서 생긴 얼룩과 종이의 결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균일하게 뽑아낸 인화가 아니라 한 장씩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사실이 감춰지지 않습니다.

- 26x38.5cm · 종이에 시아노타입 프린트 · ₩500,000
- 작품 페이지 →
〈1112_04〉 — 2024년, 종이에 시아노타입, 크기 확인 중
같은 푸른빛이지만 화면의 밀도가 다릅니다. 굵고 흰 줄기가 세로로 서 있고, 그 양옆으로 가는 잎들이 깃털처럼 퍼집니다. 바탕의 파랑도 〈공허의 돌_05〉보다 옅어서, 흰 형태와 파랑 사이의 경계가 부드럽게 풀려 있습니다. 위쪽 가장자리에는 감광액이 흘러내린 자국이 세로로 남았습니다. 숲의 이름 대신 도로 번호가 제목인 연작의 한 장입니다.

- 크기 확인 중 · 종이에 시아노타입 · ₩500,000
- 작품 페이지 →
두 점을 나란히 두면 돌과 숲이 마주 놓입니다. 하나는 이미 부서진 것, 하나는 부서지는 중인 것. 김경진 작가 페이지에서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만 고르신다면 기준은 이렇습니다. 화면이 조용하고 밀도가 높은 쪽,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게 되는 쪽은 〈공허의 돌_05〉입니다. 형태가 크고 여백이 넓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쪽은 〈1112_04〉입니다. 벽에서 몇 걸음 떨어져 보게 되는 방이라면 후자가, 책상이나 복도처럼 눈이 가까이 가는 자리라면 전자가 어울립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김경진이 씨앗페에 작품을 낸 것은 자신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사라져 가는 것 곁에 서서 그것을 기록해 온 작가가 이 구조에 참여하는 일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밀려나는 쪽에 자리를 잡는다는 점에서 하던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숲과 돌에 대해 하던 일을, 사람에 대해 한 번 더 하는 셈입니다.
작품을 처음 들이는 분이라면 이 두 점은 시작하기 좋은 자리입니다. 화면이 작고, 파랑 한 색으로 정리되어 있어 어떤 벽에도 조용히 붙습니다. 다만 하나는 기억해 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작가 스스로 "빛 바래기 쉬운 작업"이라고 밝힌 매체입니다. 직사광선이 길게 드는 벽은 피하시는 편이 좋고,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 처음 본 파랑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결함이 아니라 이 작업이 하려는 말이라는 점까지 포함해서, 한 점을 곁에 두는 일입니다. 변하지 않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속도를 함께 보기로 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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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김경진 작가는 어떤 작업을 하나요? A. '시아노타입'이라는 청사진 기법을 사용한 사진 인화로 작업합니다. 작가는 이를 "산업화시대의 청사진 기법을 사용한 사진 인화 프로세스 연구의 결과작"이라고 설명합니다. 씨앗페에 제출한 약력에 따르면 퍼포먼스·설치·평면 작업도 함께 해 왔습니다.
Q. 시아노타입이 무엇인가요? A. 작가의 설명을 따르면 산업화 시대에 쓰이던 청사진 기법을 활용한 사진 인화 방식입니다. 결과물은 짙은 푸른빛을 띠며, 빛에 바래기 쉽습니다. 작가는 이 성질 자체를 작업의 뜻으로 삼아 "그 존재로 '사라져 가고 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밝혔습니다.
Q. 〈1112〉와 〈공허의 돌〉은 각각 무엇을 찍은 건가요? A. 작가의 작업 노트에 따르면 1112는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몸과 마음을 썼던 숲이자, 현재는 확장공사가 진행 중인 비자림로의 도로 번호"입니다. 〈공허의 돌〉 연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파괴되어 제 모습을 잃은 알작지왓의 돌들에서 채취한 것"입니다.
Q. 최근 활동은? A. 2025년 7월부터 9월까지 완주문화재단의 〈완주예술방학-夏〉 레지던시에 참여해 '사라질 풍경'을 주제로 시아노타입 프린트 작업을 구상하고, 지역의 건축물과 생태를 관찰하며 글쓰기와 기록 작업을 병행했습니다(JB포스트, 2025년 9월 17일). 결과 공유 전시는 9월 16일부터 28일까지 복합문화지구 누에아트홀에서 열렸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김경진 작품은 몇 점이고 가격은? A. 〈1112_04〉(2024, 종이에 시아노타입, 크기 확인 중)와 〈공허의 돌_05〉(2024, 종이에 시아노타입 프린트, 26x38.5cm) 두 점입니다. 둘 다 ₩500,000입니다.
Q.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김경진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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