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디자인에서 출발해 드리핑과 액션 페인팅으로 제주 바다의 파도를 그리는 작가 이혜선. 꽃과 나무가 싫어졌던 시기를 지나 자연으로 돌아온 경위와, 씨앗페 출품작 〈Glory_moment#+〉 두 점을 읽습니다.
이혜선 — 무너진 뒤 다시 본 바다, 파도를 추상으로 되돌리다

이혜선이 씨앗페에 낸 두 점은 제목이 거의 같습니다. 〈Glory_moment#+33〉과 〈Glory_moment#+30〉. 번호만 다릅니다. 이 연작이 어디까지 이어져 왔는지는 그 숫자가 말해 줍니다.
연작의 뜻
작가는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에서 연작의 제목이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밝힙니다.
"Glory_moment#+ 시리즈는 '당신의 존엄한 삶을 대도약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업 방식도 같은 노트에 적혀 있습니다.
"나는 제주의 푸른바다를 경험하고 수십, 수백장의 드로잉과 드리핑기법(dripping)을 이용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 나간다. 몸을 기반으로 의도적으로 계획한 구성(드리핑기법)과 즉흥적 운동성(액션페인팅)은 이성의 우월함 뒤에 가려진 몸의 중요성과 움직임의 참모습을 추적하여 평범한 몸 안에 숨은 비범함을 찾아낸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이 방식이 무엇을 겨냥하는지도 밝힙니다.
"생명력과 역동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나의 파도는 관람객에게 삶의 새로운 비상과 도약을 이끈다. 도전하는 용기와 성장, 희망을 전달한다. 또한 관람객에게 파도치는 대도약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입체적 질감과 파도의 균열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추상 화면인데 '사실적으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파도의 형태를 닮게 그렸다는 뜻이 아니라, 파도가 부서질 때의 질감과 갈라짐을 화면 위에 실제로 만들어 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물감이 두껍게 얹혀 요철이 생기면 그 자체가 파도의 물성이 됩니다.
계획된 구성과 즉흥적 운동성이 한 문장 안에 함께 들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드리핑은 물감을 흘리는 방식이라 통제가 완전하지 않고, 액션 페인팅은 몸의 움직임이 화면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둘 다 손끝으로 형태를 다듬는 그리기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작가는 그 앞에 "수십, 수백장의 드로잉"을 놓습니다. 미리 그려 보는 일이 흘려 보내는 일의 조건이 되는 구조입니다.
미술 플랫폼 DeArt82는 그를 "인간과 삶 사이의 공간, 즉 고통과 슬픔을 넘어 희망으로 가는 길을 그리는 작가"로 소개하며, 같은 연작을 "삶 속에서 다시 비상(飛上)하라!"는 메시지로 설명합니다.
시각디자인에서 회화로
이혜선은 그림을 전공으로 시작한 사람이 아닙니다. 에코락갤러리와 DeArt82의 작가 페이지가 같은 학력을 싣고 있습니다. 2003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산업디자인과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해 졸업했고, 2007년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시각디자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에코락갤러리에 실린 이력에는 석사 논문 제목까지 남아 있습니다 — 〈한국 근대일러스트레이션의 형성과 전개: 근대성을 자각한 일러스트레이터 중심으로〉. 2008년에는 인덕대학교 멀티미디어디자인과에서 아이디어발상법을 강의했습니다.
초기 단체전의 성격도 회화 쪽이 아닙니다. 2006년 평화통일 기원 그림책 전 〈하늘날아〉(인사아트센터), 2007년 〈상상, 행동〉(세종문화회관 광화문갤러리), 2008년 통일·분단에 관한 아홉 가지 시선 〈다.가.서.다〉(한전아트센터). 일러스트레이션과 그래픽을 다루는 자리들이었습니다.
그 뒤 한동안 전시 이력이 비어 있다가 2019년에 다시 나타납니다. 제3회 보타니컬 아트전(에코락갤러리), 독일 Faber-Castell Academy 연수전(일우스페이스 별관). 식물을 세밀하게 그리는 보타니컬 아트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작가 자신이 밝혀 두었습니다. 에코락갤러리 작가 소개에 실린 글입니다.
"본격적으로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2년 넘게 몸과 마음이, 그리고 일상이 무너진 후였다. 매번 그렸던 꽃과 나무가 싫어졌고, 세상과 단절했다. 깊고 깜깜한 어둠을, 혼자힘으로 빠져나오기 힘들었지만, 가족과 친구의 만강혈성(滿腔血誠)에 다시 살아보기로 용기를 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의 일을 이렇게 씁니다.
"다시 바라본 꽃과 나무, 풀, 파도와 햇살은 예전 내가 느꼈던 느낌과 완전히 달랐다. 그때 깨달았다. 작가는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려야한다는 걸…' 나는 다시 자연을 그리면서 나만의 아픔을 치유하고 있다."
식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던 사람이 파도를 흘려 그리는 쪽으로 옮겨 간 경위가 여기 있습니다. 대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층이 달라진 것입니다. 꽃과 나무는 그대로인데 화면에서는 형태가 풀립니다.
예술을 무엇으로 보는지도 같은 글에 적혀 있습니다. "나에게 예술은 '나무'며 '숲'이다"라고 쓰고, 회화·드로잉·보타니컬아트·일러스트레이션·캘리그라피·시각디자인으로 뻗어 가는 자신의 작업을 한 배우가 여러 장르의 배역을 소화하는 일에 빗댑니다.
DeArt82가 싣고 있는 이력에 따르면 2023년과 2024년 연속으로 부천문화재단 '부천 50인의 예술가'에 선정됐고, 2024년에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준비금지원 대상과 제주 오투힐 레지던시 2기 입주작가로 선정됐습니다. 같은 자료는 2001년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회 저널일러스트 부문 대상 수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전으로는 2023년 11월 16일부터 30일까지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에서 연 《BLUEXBUSAN》이 에코락갤러리 이력에 올라 있습니다. 제목이 다시 블루입니다.
씨앗페 출품작 두 점 읽기
두 점 모두 Mixed on canvas이고, 제작 연도와 크기가 다릅니다. 하나는 가로로 선 큰 화면, 하나는 정사각형입니다.
〈Glory_moment#+33〉 — 2025년, Mixed on canvas, 72.7x91cm
세로로 긴 화면입니다. 아래쪽은 남색에 가까운 짙은 청색이 두껍게 깔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흰빛이 터져 나옵니다. 흰 부분은 매끈한 면이 아니라 무수한 점과 얼룩으로 부서져 있어, 가까이서 보면 물감이 튄 자국 하나하나가 다 보입니다. 화면 네 귀퉁이는 다시 짙은 남색으로 눌려 있어 중앙의 밝은 덩어리가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표면에 물감이 도톰하게 얹혀 빛을 받으면 실제로 요철이 드러납니다. 작가가 노트에서 "입체적 질감과 파도의 균열"이라고 적은 부분입니다.

- 72.7x91cm · Mixed on canvas · ₩7,500,000
- 작품 페이지 →
〈Glory_moment#+30〉 — 2026년, Mixed on canvas, 60.6x60.6cm
정사각형 화면입니다. 같은 파도지만 색의 온도가 다릅니다. 짙은 남색 대신 밝은 코발트와 청록이 주를 이루고, 군데군데 초록빛이 섞입니다. 흰 포말은 화면 위쪽 가운데에 모여 있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둥근 소용돌이 자국으로 풀어집니다. 33번보다 밝고 가벼운 쪽이어서, 두 점을 나란히 걸면 같은 바다의 다른 시각처럼 읽힙니다.

- 60.6x60.6cm · Mixed on canvas · ₩3,000,000
- 작품 페이지 →
고르는 기준은 벽의 크기보다 방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33번은 어둡고 무게가 있어 화면 앞에 사람을 세웁니다. 거실이나 접견 공간처럼 한 점이 중심을 잡아야 하는 자리에 맞습니다. 30번은 정사각형이라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안정적이고 색이 밝아 공간을 무겁게 누르지 않습니다. 작은 방이나 복도, 이미 다른 물건이 많은 자리에 어울립니다.
이혜선 작가 페이지에서 두 점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이혜선이 씨앗페에 두 점을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한 번 무너졌다가 자연을 다시 그리며 회복한 사람이, 지금 버티고 있는 동료의 자리에 작품을 놓는 일입니다. 연작의 제목이 "당신의 존엄한 삶을 대도약하라"인 것을 생각하면 이 참여는 작업의 연장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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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이혜선 작가는 어떤 작업을 하나요? A. 제주의 푸른 바다를 모티프로, 드리핑(dripping)과 액션 페인팅의 즉흥적 운동성을 결합해 〈Glory_moment#+〉 연작을 이어 온 추상 회화 작가입니다. DeArt82는 그를 "인간과 삶 사이의 공간, 즉 고통과 슬픔을 넘어 희망으로 가는 길을 그리는 작가"로 소개합니다.
Q. 〈Glory_moment#+〉는 무슨 뜻인가요? A. 작가는 씨앗페 출품작 노트에서 "'당신의 존엄한 삶을 대도약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DeArt82는 같은 연작을 "삶 속에서 다시 비상(飛上)하라!"는 메시지로 설명합니다.
Q. 학력과 이력은? A. 에코락갤러리와 DeArt82의 작가 페이지에 따르면 2003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산업디자인과 시각디자인 전공 졸업, 2007년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시각디자인과 수석 졸업입니다. 2008년 인덕대학교 멀티미디어디자인과에서 아이디어발상법을 강의했습니다. DeArt82 기록에 따르면 2023·2024년 부천문화재단 '부천 50인의 예술가', 2024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활동준비금지원과 제주 오투힐 레지던시 2기 입주작가에 선정됐습니다.
Q. 왜 자연을 그리나요? A. 에코락갤러리 작가 소개에 실린 글에서 작가는 "본격적으로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2년 넘게 몸과 마음이, 그리고 일상이 무너진 후였다"고 밝혔습니다. 다시 본 자연이 이전과 완전히 달랐고, "작가는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려야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적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이혜선 작품은 몇 점이고 가격은? A. 두 점입니다. 〈Glory_moment#+33〉(2025, Mixed on canvas, 72.7x91cm) ₩7,500,000, 〈Glory_moment#+30〉(2026, Mixed on canvas, 60.6x60.6cm) ₩3,000,000입니다.
Q.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이혜선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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