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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 — 오방색이 오기 전, 연필이 먼저 지나간 자리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년 9월 29일 · 씨앗페

무속과 역사를 오방색으로 그린 채색화의 거장 박생광(1904–1985). 씨앗페에 들어온 71점은 그 색이 오기 전 단계, 평생 들고 다닌 연필의 기록입니다. 진주·제주·가마쿠라·인도로 이어지는 드로잉을 계열별로 읽습니다.

박생광 — 오방색이 오기 전, 연필이 먼저 지나간 자리

박생광, 〈원앙〉, 종이에 연필, 39x27.5cm — 깃털마다 색 지정 메모가 적힌 채색 이전 단계의 드로잉
박생광, 〈원앙〉, 종이에 연필, 39x27.5cm — 깃털마다 색 지정 메모가 적힌 채색 이전 단계의 드로잉

〈원앙〉을 크게 놓고 보면 깃털 사이에 아주 작은 글씨가 박혀 있습니다. 깃 한 장 한 장에서 가는 선이 뻗어 나와 여백에 닿고, 그 끝에 일본어 메모가 달려 있습니다. 색 지정입니다. 이 자리는 무슨 색, 저 자리는 무슨 색. 종이 위에는 아직 아무 색도 없지만, 완성될 그림의 색은 이미 전부 정해져 있습니다.

박생광의 드로잉이 무엇인지를 한 장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채색화의 앞 단계. 색을 칠하기 전에 형(形)을 확정하고, 그 형 위에 색을 미리 배치해 두는 일. 씨앗페에 들어온 박생광의 작품은 71점입니다. 대부분 종이 위의 드로잉이고, 판지에 그린 것이 세 점 섞여 있습니다.

진주에서 교토까지

박생광은 1904년 8월 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계열 자료는 출생지를 진주시 망경동 15번지로 기록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출생 연도를 1904년으로 올려 두고 있습니다.

같은 자료가 전하는 학적은 이렇습니다. 1914년 진주보통학교, 1917년 진주농업학교. 그리고 1920년, 열여섯 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가 타치가와 세이운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웁니다. 1923년에는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 들어가고, 재학 중 여러 전시에서 입선합니다.

교토에서 그가 배운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이 작가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문제가 됩니다. 마리끌레르코리아는 그가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다케우치 세이호와 무라카미 가가쿠 등을 사사해 "채색 중심의 일본화"를 배웠다고 정리합니다. 근대 일본화의 정교한 채색 기법을, 그것도 그 기법이 가장 단단하던 시기의 교토에서 익혔다는 뜻입니다.

기술은 확실하게 남았습니다. 문제는 그 기술이 어느 나라 것으로 보이느냐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풀리기까지 그에게는 반세기가 더 필요했습니다.

돌아와서, 오래 머물다

광복 이후 귀국한 뒤의 시기를 씨앗페의 작가 소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평생을 일본풍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았지만,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놀랍고도 대담한 예술적 변신을 성공해냈다."

'평생'과 '마지막 8년'이라는 두 단어 사이의 낙차가 박생광이라는 화가의 전부입니다. 여든 가까이 살아온 방식이 한 번에 뒤집힌 것이고, 그 뒤집힘이 미술사에 남았습니다.

그 사이의 긴 시간이 비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경남일보는 그의 예술적 열정이 뜨거웠던 시기를 1945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려 잡으며, 당시 그가 예술 전반에 관심이 컸고 예술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전합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드로잉 가운데 연도가 가장 이른 것들이 정확히 이 시기를 가리킵니다. 〈진주 창렬사〉 1950년 10월, 〈진주 창열사〉 1950년 12월, 〈진주 남강 풍경〉 1951년 12월, 〈진주 문산〉 1952년 11월. 전쟁 중입니다. 이 사람은 그 시기에 고향의 사당과 강과 읍내를 연필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1971년의 일화도 남아 있습니다. 조선일보는 그가 도선사 주지였던 청담 스님 가까이에서 살겠다며 우이동에 터를 잡았으나, 청담은 바로 그해 입적했다고 전합니다. 같은 기사는 그 죽음 이후에 박생광의 각성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적었습니다.

마지막 8년 — "오방색으로 세계와 승부하고 싶다"

한국경제신문은 1980년 전후 그가 보여준 변신을 두고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팔순"의 일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79세 되던 1982년, 혜초의 길을 따라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평소 갈망하던 파리 여행까지 마칩니다.

그 여행 뒤의 작업을 세계일보는 "박생광 스타일을 완성한 대표작"으로 분류합니다. 토함산 해돋이, 탈, 단군, 십장생, 창, 불상, 단청, 부적, 무당 — 씨앗페 작가 소개가 열거하는 그 시기의 주제들입니다. 수묵화에 강렬한 오방색 채색을 섞는 기법으로, 소개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와 민족성이 마치 들끓어 오르는 생명력으로" 다가오는 화면이 나왔습니다.

무속으로 들어간 방식은 문헌 조사가 아니었습니다. 매일경제는 그가 만신 김금화의 굿판을 밤낮으로 쫓아다녔다고 전합니다. 본인의 말도 남아 있습니다.

"단청이나 무속의 색깔을 보아라. 서양 야수파의 색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친다."

"나는 오방색으로 세계와 승부하고 싶다." — 뉴시스, 2026년 5월 28일 보도에 인용된 생전 발언

승부라는 단어를 여든 넘은 화가가 씁니다. 그리고 실제로 승부가 붙었습니다. 1985년 파리 그랑팔레미술관의 《르 살롱-85》 특별 초대전에 참여했고, 매일경제에 따르면 〈무당〉(1982)이 그 파리 특별전의 공식 포스터로 쓰였습니다. 같은 해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경남매일뉴스는 그가 후두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전합니다. 1985년입니다.

지금 그의 작품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전봉준〉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명성황후〉와 〈토함산 해돋이〉는 이영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2026년에는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박래현·김기창과 함께 한국 현대 채색화의 흐름을 조망하는 기획전이 열렸고, 진주에서는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이 《내고 박생광-진주에 묻다》를 마련했습니다.

씨앗페에 온 71점 — 계열로 읽기

여기까지가 색의 이야기입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71점은 그 색이 오기 전 단계입니다. 대부분 종이에 연필이고(47점), 판지에 그린 것이 세 점입니다. 나머지에는 잉크·볼펜·색연필·수채가 조금씩 섞여 있습니다. 화면은 대개 손바닥에서 공책만 한 크기 — 가장 작은 〈피리부는 사람〉이 11.3x9.5cm, 가장 큰 축에 드는 〈원앙〉이 39x27.5cm입니다.

묶어서 보면 한 사람이 평생 어디를 다녔고 무엇 앞에서 멈춰 섰는지가 드러납니다.

진주와 경남, 1950년대 초 — 6점

〈진주 창렬사〉(1950 10 13)·〈진주 창열사〉(1950년12월06일)·〈진주 남강 풍경〉(1951년12월18일)·〈진주 문산〉 두 점(1952년11월02일)·〈창녕 만옥정〉(1953년07월18일).

〈진주 창열사〉를 열어 보면 화면 아래 왼쪽에 "4283. 12. 6"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단기 연호입니다. 서기로 1950년 12월. 사당의 팔작지붕만 또렷하게 잡혀 있고 그 아래 담과 기와 무더기는 선이 닿다 만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끝까지 그리지 못한 종이가 그대로 남은 셈입니다.

〈진주 문산〉은 냇가에서 빨래하는 네 사람과 그 곁의 오리들을 그린 것으로, 화면 오른쪽 위에 "85. 11. 2"라고 단기 연호의 뒷자리만 적혀 있습니다. 씨앗페에는 같은 제목·같은 날짜·같은 크기의 작품이 두 점 들어와 있습니다.

박생광, 〈진주 문산〉, 종이에 연필, 25.1x18.1cm, 1952년11월02일
박생광, 〈진주 문산〉, 종이에 연필, 25.1x18.1cm, 1952년11월02일

제주, 1956년 1월 — 4점

〈천제연〉·〈중문 계곡〉·〈재주해안〉·〈중문폭포〉. 앞의 세 점에 1956년 1월이라는 날짜가 붙어 있습니다.

〈재주해안〉의 오른쪽 아래에는 "4289. 1. 30"과 한자 몇 자가 적혀 있습니다. 화면은 세 겹입니다. 맨 위에 파도, 가운데에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사람들이 스무 명 남짓, 아래에 둥근 것들이 촘촘히 깔린 자갈밭. 사람들은 얼굴 없이 굽은 등과 팔로만 그려져 있고, 그 사이를 새 몇 마리가 지나갑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각도입니다.

박생광, 〈재주해안〉, 종이에 연필, 27x19cm, 1956년01월30일
박생광, 〈재주해안〉, 종이에 연필, 27x19cm, 1956년01월30일

유물 앞에서 — 5점

〈금강역사〉·〈청자진사채당초문대접〉·〈해인사〉·〈그릇(양면)〉·〈면깍이 항아리&호부호(양면)〉.

이 묶음이 박생광의 드로잉이 어떤 물건이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유물 앞에서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기록을 남겼습니다.

〈청자진사채당초문대접〉은 대접 하나를 외곽선만으로 그린 담백한 화면인데, 아래쪽 여백에 이렇게 적어 두었습니다. "청자진사채당초문대접 / 입지름 17.8cm / 영국 대영박물관 / 12세기 고려." 치수와 소장처와 시대가 한 줄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림이 아니라 카드 목록에 가깝습니다.

〈금강역사〉는 붉은 글씨가 함께 있습니다. 왼쪽 여백에 붉은 색연필로 "불국사(佛國寺) / 금강역사(金剛力士) / 토함산(吐含山)"이라고 썼습니다. 얇은 종이라 뒷면의 그림이 비쳐 보이고, 앞면에는 광배를 두르고 한 팔을 치켜든 역사가 연하게 잡혀 있습니다.

박생광, 〈금강역사〉, 종이에 연필, 18x26cm — 여백에 붉은 글씨로 불국사·금강역사·토함산이라 적혀 있다
박생광, 〈금강역사〉, 종이에 연필, 18x26cm — 여백에 붉은 글씨로 불국사·금강역사·토함산이라 적혀 있다

〈해인사〉는 파란 볼펜으로 절 전체를 내려다보며 그린 것입니다. 전각 수십 채의 지붕이 겹겹이 이어지고, 오른쪽 위에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라고 한자로 적혀 있습니다. 볼펜이라 고쳐 그린 자리가 그대로 남습니다.

가마쿠라, 1975년 봄 — 3점

같은 제목의 〈가마쿠라 나무〉가 세 점 있고, 날짜가 1975년 2월 22일·2월 23일·3월 22일로 한 달 사이에 몰려 있습니다.

그중 3월 22일 자를 보면 오른쪽 아래에 "75·3·22"와 가타카나로 "カマクラ"라고 적혀 있습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의 가지만 그렸는데, 가지가 사방으로 꺾이고 뒤틀린 모양이 화면 전체를 채웁니다. 굵기를 살린 선과 가늘게 스친 선이 섞여 있어, 같은 연필로 그렸는데도 앞가지와 뒷가지가 갈립니다.

박생광, 〈가마쿠라 나무〉, 종이에 연필, 22.6x15.9cm, 1975년03월22일
박생광, 〈가마쿠라 나무〉, 종이에 연필, 22.6x15.9cm, 1975년03월22일

인도, 1982년 2월 — 10점

〈인도 기행〉·〈인도 기행 중〉·〈인도 기행 중-1〉·〈인도 기행 중-4〉·〈인도여행에서 1〉·〈인도여행에서 2〉·〈마차-인도 기행 중 거리 풍경〉·〈원숭이-인도 기행 중〉·〈우마와 시마〉·〈아지안타& 정각산 (앞뒤 양면)〉.

앞서 본 성지순례가 이 묶음입니다. 날짜가 적힌 것들은 전부 1982년 2월을 가리킵니다. 79세의 화가가 한 달 동안 인도에서 그린 것들이 열 점 남아 씨앗페에 왔습니다.

〈우마와 시마〉는 석조 부조를 옮겨 그린 것입니다. 광배를 두른 인물과 그 옆의 인물이 소를 타고 있고, 둘레를 작은 상들이 층층이 둘러쌉니다. 화면 아래에 번호 "12", 그리고 "11~13세기", 다시 "4315. 2. 16 / 우마와 시-바 / 부처(夫妻)". 유적의 제작 시기와 도상의 이름과 자기가 본 날짜를 한자리에 적어 두었습니다. 앞의 〈청자진사채당초문대접〉과 똑같은 습관입니다.

박생광, 〈우마와 시마〉, 종이에 연필, 16.8x25.1cm, 1982년02월16일
박생광, 〈우마와 시마〉, 종이에 연필, 16.8x25.1cm, 1982년02월16일

되살아나는 풍경 — 10점

〈되살아나는 풍경〉과 번호가 붙은 〈되살아나는 풍경 1〉부터 〈7〉, 그리고 〈10〉·〈11〉. 씨앗페에서 한 제목으로 가장 여러 점이 들어온 연작입니다.

제목만 놓은 첫 점에는 씨앗페가 받은 작품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가기 전에 박생광은 우리 건축물을 소재로 한 작업을 시도한다. 우리 건축의 문을 그린 이 작업은 그래서 예비작업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남은 것은 매우 드물다. 이 연필화는 그 중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 이 작업을 본 지인들은 적절하지 않다고 조언했고, 이를 받아들인 박생광은 귀국하여 서울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이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나비나 소맷돌 같은 이런 저런 소재를 더하여 그려낸다." — 최석태 미술평론가

화면을 보면 설명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널판 결이 세로로 죽죽 그어진 문짝 두 짝이 가운데 서 있고, 위에 1·2·3·4 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 네 귀퉁이에는 경첩과 고리와 문고리가 따로 떼어져 확대되어 있습니다. 문 한 짝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문 한 짝을 해부한 도면입니다. 여백에 적힌 메모까지 더하면 이것이 완성작을 위한 준비였다는 말이 그대로 납득됩니다.

박생광, 〈되살아나는 풍경〉, 25.8x18.7cm — 문짝과 경첩·고리를 따로 떼어 그린 예비 작업
박생광, 〈되살아나는 풍경〉, 25.8x18.7cm — 문짝과 경첩·고리를 따로 떼어 그린 예비 작업

사람을 보는 눈 — 9점

〈의자에 앉은 누드〉(1971년3월25일)·〈다리를 오므리고 앉은 누드〉(1973년04월23일)·〈두 팔을 들고 앉은 모델〉·〈드러누운 누드〉·〈드러누운 누드 여인〉·〈발〉·〈연주〉·〈장구치는 여자〉·〈피리부는 사람〉.

앞의 다섯 점은 모델을 앉히고 그린 인체 습작에 가깝습니다. 〈다리를 오므리고 앉은 누드〉는 뒤돌아 앉은 몸을 등 쪽에서 잡았고, 연필을 눕혀 문지른 면이 등과 허벅지에 두껍게 깔려 있습니다. 이 묶음에서만 박생광의 선이 아니라 박생광의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장구치는 여자〉는 성격이 다릅니다. 종이 자체가 오각형으로 잘려 있고, 그 위에 장구를 안고 치는 사람이 네 번 반복해서 그려져 있습니다. 같은 동작을 각도만 바꿔 네 번 본 것입니다. 무속과 굿판으로 들어가는 시선이 여기서 이미 연습되고 있습니다.

생물과 뜰 — 8점

〈원앙〉·〈다람쥐들〉·〈나뭇잎〉·〈정원의 꽃과 사마귀〉·〈정원의 꽃과 사마귀2〉·〈소 (앞뒤 양면)〉·〈귤〉, 그리고 이미 새 주인을 만난 〈쏘가리〉.

맨 앞에 놓은 〈원앙〉이 이 묶음의 성격을 대표합니다. 깃털을 한 장씩 세어 가며 그리고, 그 위에 색을 적어 둔 그림. 종이에 연필, 39x27.5cm로 71점 가운데 큰 편에 속합니다.

〈정원의 꽃과 사마귀〉에는 "1979. 9. 25 / 我庭"이라 적혀 있습니다. 우리 집 뜰이라는 뜻입니다. 위쪽 꽃은 연필로, 아래쪽 사마귀는 잉크로 그렸고, 사마귀 옆에 한자로 "螳螂"이라 써 두었습니다. 날개의 맥까지 한 줄씩 그어 놓았습니다.

〈다람쥐들〉은 사고가 한 번 있었던 종이입니다. 갈색 종이에 다람쥐 네댓 마리가 연필로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 위 한 마리 자리에 흰 종이를 오려 붙이고 그 위에 파란 볼펜으로 다시 그렸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 덧댄 자리가 그대로 작품이 되어 남았습니다.

박생광, 〈다람쥐들〉, 종이에 연필 및 볼펜, 14.8x13.3cm — 한 마리 자리에 흰 종이를 덧대 볼펜으로 다시 그렸다
박생광, 〈다람쥐들〉, 종이에 연필 및 볼펜, 14.8x13.3cm — 한 마리 자리에 흰 종이를 덧대 볼펜으로 다시 그렸다

풍경과 그 밖 — 나머지

〈항구〉 두 점·〈항구 풍경〉·〈항구의 배〉·〈산 풍경〉·〈풍경〉 세 점·〈하남풍경인가〉(1958년06월25일)·〈인물이 있는 풍경〉(1960년10월08일)·〈송도 일출〉(1977년11월21일)·〈빨래하는 여인들〉·〈미상〉, 그리고 〈파괴된 터전에서 1〉·〈파괴된 터전에서 2〉, 이미 새 주인을 만난 〈백두산 천지 아침〉.

〈파괴된 터전에서 1〉은 이 묶음에서 화면이 가장 넓은 축입니다. 언덕 위의 누각과 아래쪽의 긴 팔작지붕 건물, 그 사이를 잇는 돌계단, 둘을 감싼 나무들이 한 화면에 들어 있습니다. 연필 강약만으로 앞뒤를 나눴고, 지붕 기와는 한 줄씩 그어 세었습니다.

박생광, 〈파괴된 터전에서 1〉, 종이에 연필, 크기 확인 중
박생광, 〈파괴된 터전에서 1〉, 종이에 연필, 크기 확인 중

이 드로잉들이 지나온 자리

박생광의 작품은 씨앗페 안에서도 여러 전시를 거쳤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와 예전에 어디 걸렸는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지금: 69점이 씨앗페 상설 온라인 갤러리에 나와 있습니다. 작가 페이지에서 한 번에 보실 수 있는 것이 이 69점입니다.

끝난 전시 ①: 2026년 5월 20일부터 6월 28일까지 서울 은평구 갤러리 PEG에서 《박생광 드로잉전》이 열렸습니다. 한국스마트협동조합이 주최했고, 지금 씨앗페에 있는 작품 대부분이 그때 그 전시를 거쳤습니다. 이미 끝난 전시입니다.

끝난 전시 ②: 그중 여섯 점(〈귤〉·〈되살아나는 풍경〉·〈되살아나는 풍경 7〉·〈미상〉·〈원앙〉·〈풍경〉 27x19cm)은 그 뒤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오윤 테라코타 보존 기금마련전에도 걸렸습니다. 이 역시 이미 끝난 별개 행사이고, 그 전시의 판매 수익은 오윤 테라코타 작품의 보존 비용으로 갔습니다. 아래에서 이야기할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과는 무관합니다.

고르는 법

69점의 가격은 ₩1,000,000에서 ₩5,000,000 사이입니다. 절반이 훨씬 넘는 49점이 ₩2,000,000이고, ₩3,000,000이 11점, ₩1,000,000이 4점, ₩1,500,000이 2점, ₩5,000,000이 3점입니다. 값의 폭이 좁으니 가격표를 먼저 보실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대신 세 가지로 갈라 보시길 권합니다.

첫째, 장소로 고르는 방법. 진주(1950년대 초)·제주(1956)·가마쿠라(1975)·인도(1982) 네 묶음이 각각 다른 시기의 박생광입니다. 고향이면 진주, 여행의 기록이면 인도.

둘째, 완성작과의 거리로 고르는 방법. 〈원앙〉과 〈되살아나는 풍경〉 연작처럼 색 지정과 부분 확대가 들어간 것들은 채색화 바로 앞 단계입니다. 박생광의 오방색 그림이 어떻게 설계됐는지를 보려면 이쪽입니다. 반대로 〈가마쿠라 나무〉나 〈재주해안〉은 그 자리에서 그려 그 자리에서 끝난 것들입니다.

셋째, 글씨가 있는 것으로 고르는 방법. 〈청자진사채당초문대접〉·〈금강역사〉·〈해인사〉·〈우마와 시마〉처럼 여백에 지명과 치수와 시대가 적힌 것들이 있습니다. 화가가 무엇을 확인하며 다녔는지가 손글씨로 남아 있는 종이입니다.

화면이 대체로 작으므로, 걸 자리는 넓은 벽 한가운데보다 가까이서 보는 자리 — 책상 앞, 복도, 계단참 — 가 어울립니다. 여러 점을 한 벽에 나란히 걸어 계열을 만드는 방식도 이 작가에게는 잘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씨앗페에 나와 있는 작품의 판매 수익 가운데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됩니다. 이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에게 저금리로 빌려주는 재원이 됩니다. 제1금융권의 심사표가 예술인의 소득을 읽지 못해 생긴 공백을, 작품이 팔린 자리에서 조금씩 메우는 구조입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 참여한 것이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들입니다. 박생광의 드로잉 69점이 지금 이 갤러리에 놓여 있다는 것도 같은 구조 안의 일입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박생광은 여든 넘어 오방색을 꺼내 들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린 화가입니다. 그 기다림의 대부분이 이 종이들 위에 있습니다. 완성작이 되어 미술관에 걸린 그림은 몇 점이고, 그 앞에서 연필로 세어 본 깃털과 기와와 문고리는 수천 개였습니다. 박생광 작가 페이지에서 그 종이들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박생광 작품 69점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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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박생광은 어떤 작가인가요? A. 1904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1985년 세상을 떠난 화가입니다. 일본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채색 중심의 일본화를 배웠고, 1980년 전후부터 토함산 해돋이·탈·단군·불상·단청·부적·무당 같은 한국적 주제를 수묵에 강렬한 오방색 채색을 섞는 기법으로 그려 한국 수묵채색화의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Q. 대표작과 소장처는 어디인가요? A. 〈전봉준〉은 국립현대미술관, 〈명성황후〉와 〈토함산 해돋이〉는 이영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무당〉(1982)은 1985년 파리 그랑팔레미술관 《르 살롱-85》 특별 초대전의 공식 포스터로 쓰였다고 매일경제가 전했고, 2021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2억2000만원에 낙찰됐다고 경남매일뉴스가 보도했습니다.

Q. '오방색으로 세계와 승부하고 싶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A. 생전 발언으로, 2026년 5월 뉴시스 보도에 인용됐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단청이나 무속의 색깔을 보아라. 서양 야수파의 색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생명력이 넘친다"고도 말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박생광 작품은 어떤 것들인가요? A. 대부분 종이 위의 드로잉입니다. 71점 가운데 47점이 종이에 연필이고, 판지에 그린 것이 세 점입니다. 나머지에는 잉크·볼펜·색연필·수채가 섞여 있고, 재료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진주와 경남(1950년대 초), 제주(1956년 1월), 가마쿠라(1975년), 인도(1982년 2월) 등 시기와 장소별로 묶어 볼 수 있으며, 〈되살아나는 풍경〉 연작이 10점으로 가장 많습니다.

Q. 드로잉인데 왜 중요한가요? A. 박생광의 채색화는 색을 칠하기 전에 형을 확정하는 단계를 거쳤습니다. 〈원앙〉에는 깃털마다 색 지정 메모가 달려 있고, 〈되살아나는 풍경〉에는 문짝과 경첩·고리가 번호를 매겨 따로 그려져 있습니다. 완성작이 어떻게 설계됐는지를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Q. 가격대는 어떻게 되나요? A. 판매 중인 69점이 ₩1,000,000~₩5,000,000 구간에 있습니다. 49점이 ₩2,000,000으로 가장 많고, ₩3,000,000이 11점, ₩5,000,000이 3점입니다. 화면 크기는 대체로 손바닥에서 공책만 한 정도입니다.

Q. 박생광 작품을 사면 수익은 어디로 가나요? A.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품을 내놓은 쪽에 돌아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Q. 《박생광 드로잉전》은 지금도 볼 수 있나요? A. 아닙니다. 2026년 5월 20일부터 6월 28일까지 서울 은평구 갤러리 PEG에서 열렸고 이미 끝났습니다. 지금은 씨앗페 상설 온라인 갤러리에서 69점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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