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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국 — 욕지도에서 국회까지, 먹으로 쓰고 그리는 섬체의 화가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년 9월 21일 · 씨앗페

통영 욕지도에서 나고 자라 참치 요리사로, 계약직 공무원으로, 그리고 예순이 되어서야 전업 화가로 돌아온 김흥국. 그가 개발한 캘리그라피 ‘섬체’와 창원국가산단을 그린 대형 걸개그림, 그리고 씨앗페에 낸 진관사 태극기 재현작을 따라 읽습니다.

김흥국 — 욕지도에서 국회까지, 먹으로 쓰고 그리는 섬체의 화가

김흥국, 〈다시 그린 진관사 태극기〉, 종이에 먹·혼합재료, 53.4x42(실측60%)cm — 1919년 3·1운동 당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진관사 태극기를 실측 60% 크기로 재현한 작품
김흥국, 〈다시 그린 진관사 태극기〉, 종이에 먹·혼합재료, 53.4x42(실측60%)cm — 1919년 3·1운동 당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진관사 태극기를 실측 60% 크기로 재현한 작품

1960년 경남 통영 욕지도에서 태어나 지금도 그 섬에 살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 김흥국입니다.

씨앗페에 그가 낸 작품은 한 점, 〈다시 그린 진관사 태극기〉입니다. 2009년 서울 진관사에서 발견되어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실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유물, 진관사 태극기를 실측 크기의 약 60%로 재현한 그림입니다. 이 한 점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두 갈래 길 — 섬에서 익힌 먹의 감각과, 뒤늦게 시작한 작가로서의 삶 — 을 먼저 따라가야 합니다.

욕지도, 요참치, 계약직 공무원

김흥국은 1960년 통영 욕지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잠수부로 바다에서 일했는데, 그가 어렸을 때 조업 중 큰 화상을 입어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는 교육에 대한 열의가 컸고, 어린 그는 섬을 떠나 삼천포로 나가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고교 2학년 시절, 양효규 교사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사생대회 참가를 권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동의대학교 미술학과에 서양화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대학에서는 조소·서예·사진·회화를 두루 익혔고, 부산지역 대학생들을 모아 '조형예술연구회'를 결성해 주도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졸업과 함께 현실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생계를 위해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도면을 그리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림을 위해 그림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그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 욕지도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섬에서 미술학원을 열어 생계를 잇는 한편, 귀향인으로서 뭔가 역할을 하겠다는 마음에 집필위원회를 꾸려 5년여에 걸쳐 1300여 쪽 분량의 『욕지면사(史)』를 펴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통영시청 소속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고, 섬문화축제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는 동안 그림과는 점점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전환점은 2013년에 왔습니다. 통영시 노인대학 욕지분원이 개설되면서 대학 전공을 살려 캘리그라피 강사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캘리그래피를 가르치다가 본격적으로 서양화 전공을 캘리그래피와 접목해 욕지의 섬과 바다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2020년 12월, 통영시청을 퇴직하면서 그는 은퇴식 대신 통영 영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퇴직이 전업 작가 생활의 시작이 된 셈입니다.

퇴직 후에는 또 다른 일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욕지 앞바다에서 양식하는 참치는 대부분 일본으로 팔려 나가거나 냉동으로 유통되던 터라, 그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생참치 요리점 '요참치'를 열었습니다. 요리학원에서 일식을 배우고 일본 각지를 다니며 기법을 익혔으며, 참치 해체는 유튜브를 보며 스스로 터득했습니다. 2021년 11월 첫 시연 이후 지금까지 크게는 120kg에 이르는 참치를 50여 마리 넘게 직접 해체해온 그는, 요리와 그림 모두 시각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창의적 작업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고 말합니다. 식당 운영은 대학 시절 만나 부부가 된 아내 최연숙이 맡고 있습니다.

작품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도예가 강경화였습니다. 강경화가 욕지초등학교에서 매주 여는 도자기 수업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의 내공을 금방 알아보았고, 강경화는 자신이 활동하던 경남민족미술인협회에 그를 초대했습니다. 이후 다양한 전시회를 함께하면서 그는 통영아트페어와 창원, 일본 등 국내외 전시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경남민족미술인협회와 경남민예총, 한국캘리그라피창작협회, 한국섬섬문화예술창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섬체 — 섬을 글자로, 글자를 그림으로

김흥국을 다른 작가와 구분 짓는 것은 그가 만든 '섬체'라는 캘리그라피입니다. 호선지에 먹을 이용해 섬의 형상을 글씨로도 그림으로도 읽히게 만드는 독자적인 기법으로, 그는 이 기법을 실험적으로 발전시켜왔습니다.

2023년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본 나고야 갤러리 '핑거포럼'의 초대로 연 개인전에서 그는 섬체로 만든 '섬' 연작을 선보였습니다. 그의 네 번째 개인전이었습니다. 이 전시는 당시 세계적으로 이목이 집중되었던 일본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겨냥한 고발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인구감소로 소멸되고 사라져 가는 섬과 방사능 오염수 방류로 인한 해양환경 오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싶었다." — 통영신문, 2023년 12월 5일

섬이 사라지는 문제와 바다가 오염되는 문제를 자신이 만든 글자체로 고발한 셈입니다. 그가 다루는 소재는 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愚民(어리석은 백성)이라는 뜻의 '우민'이라는 호를 쓰며, 월간중앙에 종이에 먹으로 그린 시사성 짙은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2025년 을사년 새해를 앞두고 발표한 〈한국이여 興國하라〉에서는 태극 문양과 '산'·'섬' 두 글자를 캘리그라피로 겹쳐 그렸습니다. 작품에 붙인 그의 글은 이렇습니다.

"태극 문양은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산은 백두대간을, 섬은 한반도 열도를 나타낸다. 그 중 독도를 닮았다. 모두 한글 '산'자와 '섬'자를 캘리그라피로 표현했다." — 월간중앙 202501호, 2024년 12월 20일

한 달 뒤 발표한 〈2025 겨울공화국〉에서는 시국을 향한 발언 쪽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권력자의 권력 앞에 자유로운가? 깨어 있는 이들의 행동으로 저항하여 제6공화국까지 왔다. 긴 겨울, 다음은 봄 아니겠는가. 그 봄은 언제 오는가? 은박 담요를 입은 백성들은 대한민국의 봄을 기다린다." — 월간중앙 202502호, 2025년 1월 20일

섬의 소멸, 바다의 오염, 나라의 봄 — 소재는 계속 바뀌었지만 방식은 한결같습니다. 먹과 화선지로, 자신이 만든 섬체 글씨를 그림 속에 녹여 시대를 발언하는 것입니다.

창원산단, 글자로 만든 사람들

2024년, 김흥국은 자신이 나고 자란 섬을 벗어나 전혀 다른 소재를 마주했습니다.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 50주년이었습니다. 전시 일정으로 창원을 자주 오가면서 이 도시의 역동성에 매료된 그는, 창원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자료를 모으고 여름 내내 작업실에서 묵향과 땀방울로 채운 끝에 대형 걸개그림 '창원산단'을 완성했습니다. 공업단지를 만들고 이끌어온 수많은 사람이 그림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창원'이라는 글자로 만든 사람의 형상입니다. 섬체에서 익힌 방식 — 글자를 그림으로 바꾸는 — 이 이번에는 노동자의 몸을 향한 셈입니다.

이 걸개그림은 2024년 10월 창원여성회관 마산관 로비에서 처음 공개되어 지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허성무(창원 성산) 국회의원이 국회 전시를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2024년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국회의원회관 1층 국회아트갤러리에서 '창원국가산단50년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전시를 주최한 허성무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품 속에 담긴 창원이라는 글자와 그 속의 노동자 형상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창원국가산단은 단순히 공업단지를 넘어 노동자들의 땀과 희생으로 이뤄진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다." — 뉴시스, 2024년 11월 26일

욕지의 섬을 그리던 화가가 국회의사당 전시장에 걸개그림을 걸기까지, 그 사이에는 요리사로 보낸 시간과 공무원으로 보낸 시간, 그리고 예순을 넘겨서야 되찾은 화가로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 〈다시 그린 진관사 태극기〉

씨앗페에 그가 낸 작품은 〈다시 그린 진관사 태극기〉 한 점입니다. 2025년, 종이에 먹과 혼합재료, 53.4x42(실측60%)cm.

진관사 태극기는 2009년 서울 진관사에서 발견되어 붙은 이름으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실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 유물입니다. 태극기를 만들 천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누군가 일장기 위에 먹으로 태극과 사괘를 덧그려 태극기로 바꾸었습니다. 일제의 상징이던 천 위에 먹선을 얹어 독립의 상징으로 바꾼 것입니다. 김흥국은 이 원본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실측 크기의 약 60%로 충실하게 재현했습니다.

도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림만 옮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종이 표면 전체에 세월이 앉은 자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왼쪽 위 모서리는 실제로 찢겨 나간 것처럼 흰 속지가 드러나 있고, 화면 곳곳에는 물에 젖었다 마른 자국 같은 갈색 얼룩이 번져 있습니다. 네 귀퉁이의 사괘는 먹선의 굵기가 균일하지 않은 채로, 손으로 그은 붓질의 흔들림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습니다. 중앙의 태극 문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색입니다. 선명한 빨강과 파랑이 아니라, 한쪽은 녹슨 듯한 주황빛이고 다른 한쪽은 검은 먹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작가 설명이 전하는 제작 배경 — 일장기의 붉은 해 위에 먹으로 태극을 그렸다는 사실 — 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결과로 읽힙니다. 원본 일장기의 붉은 해가 세월에 바래 주황빛으로 남고, 그 위에 얹힌 먹의 소용돌이가 검게 자리한 것입니다. 색을 새로 칠한 것이 아니라 원본이 겪은 시간을 색으로 옮겨 적은 셈입니다.

섬을 그리던 붓과 창원의 노동자를 그리던 붓이 이번에는 백 년 전의 유물을 향했습니다. 소재는 매번 달라졌지만, 먹과 화선지로 지금 눈앞의 것을 정직하게 옮기는 태도는 그대로입니다.

씨앗페에서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욕지도에서 참치를 해체하다가도 먹을 들면 화가로 돌아가는 김흥국 역시, 자신의 사정이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위해 이 구조에 참여했습니다.

김흥국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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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화가 김흥국은 가수 김흥국과 같은 사람인가요? A.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이 글의 김흥국은 1960년 경남 통영 욕지도에서 태어나 동의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지금도 욕지도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Q. 김흥국 작가는 어떤 작업을 하나요? A. 자신이 개발한 캘리그라피 기법 '섬체'로 섬과 바다를 그려왔고, 태극 문양과 한글 자모를 결합한 시사성 짙은 작품도 발표합니다. 2024년에는 창원국가산업단지 50주년을 소재로 '창원'이라는 글자로 노동자의 형상을 그린 대형 걸개그림을 완성해 국회아트갤러리에서 전시했습니다.

Q. '섬체'는 무엇인가요? A. 김흥국이 만든 독자적인 캘리그라피 기법입니다. 호선지에 먹을 이용해 섬의 형상을 글씨이자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2023년 일본 나고야 갤러리 '핑거포럼' 초대전에서는 이 기법으로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와 섬의 소멸 문제를 다룬 '섬' 연작을 선보였습니다.

Q. 창원국가산단 작품은 어떤 작품인가요? A. 2024년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 50주년을 맞아 제작한 대형 걸개그림 '창원산단'입니다. 공업단지를 만들고 이끌어온 사람들이 화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창원'이라는 글자로 만든 사람의 형상입니다. 2024년 10월 창원여성회관 마산관에서 처음 공개된 뒤, 허성무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같은 해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국회의원회관 국회아트갤러리에서 '창원국가산단50년 기획전'으로 전시됐습니다.

Q. 씨앗페에 낸 작품은 무엇인가요? A. 〈다시 그린 진관사 태극기〉(2025, 종이에 먹·혼합재료, 53.4x42(실측60%)cm) 한 점입니다. 2009년 서울 진관사에서 발견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당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를 실측 크기의 약 60%로 재현한 작품입니다.

Q. 김흥국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김흥국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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