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떨어진 나뭇잎과 잡초를 말려 동판에 새기고, 염화제이철에 며칠씩 담가 부식시키는 판화가 권신애. 항아리 위에 덩굴을 얹고 오윤의 인물을 작게 찍어 넣은 〈바람의 기억〉을 따라 읽습니다.
권신애 — 주운 잎을 동판에 새기고, 며칠씩 부식시키는 판화가

옅은 푸른 종이 한가운데 항아리 하나가 앉아 있습니다. 분홍과 보라, 하늘색이 물에 번지듯 섞인 몸통 위로 청록색 덩굴이 오르고, 그 사이사이에 손톱만 한 붉은 사람 모양이 찍혀 있습니다. 권신애의 〈바람의 기억〉입니다. 씨앗페 온라인관에서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과 함께 만나는 작품입니다.
이 항아리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권신애는 30여 년 동안 동판화를 해온 판화가이고, 항아리와 꽃, 나비는 그가 오래 되풀이해 그려온 자아의 그릇입니다. 이 글은 그 오래된 그릇에 이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를 따라갑니다.
성신여대에서 동판 앞까지
권신애는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1994년에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판화과를 1997년에 마쳤습니다. 그림에서 출발해 판으로 옮겨 앉은 이력입니다. 작가 소개문은 이후를 이렇게 적습니다. 30여 년간 동판화를 주로 했고, 개인전은 18회, 그룹전과 아트페어는 100회가 넘습니다.
전시장 바깥에서는 판화가들의 모임에서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문 전시 《SAAF 2025》에서 판화과 동문 모임인 성신판화회의 회장으로 무대에 올랐다고 국제뉴스가 전했습니다. 2026년 3월에는 서울 인사동 마루아트센터의 판화 12인전 《유연하게 자유롭게 Flexible Ad libitum》(3월 25일~30일)에 참여했습니다.
주로 서 온 자리는 평창동의 아트스페이스 퀄리아입니다. 2017년 이주희와의 2인전, 2021년 3월 개인전 《版 STORY》, 2022년 초대전이 모두 그곳에서 열렸습니다. 2023년에는 부산국제아트페어에 작품을 냈고, 그 자리에서 국제교류재단 k.art의 영상 인터뷰가 이루어졌습니다. 인터뷰 소개문은 권신애를 이렇게 부릅니다. "단 한 장의 판화만 만들어내는 작가."
이 한 문장이 작업의 성격을 잘 붙듭니다. 판화는 같은 판으로 여러 장을 찍는 기술이지만, 권신애는 판화의 복수성보다 판이 지닌 회화성에 마음을 두는 작가로 읽혀 왔습니다. 2015년 판화전에 글을 쓴 평론가 임대식은 "판화의 복수성보다는 판화 자체가 지니고 있는 회화성에 더 심취해 있는 듯하다"고 적었습니다.
잎을 줍고, 말리고, 새기고, 담근다
권신애의 작업은 길에서 시작합니다. 작가노트는 그 시작을 이렇게 적습니다.
"나는 길가에 생명을 다하고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말리고 그것에 또 다른 생명의 의미를 넣어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 권신애 작가노트, 2021
주워 온 잎, 길가에 흔한 잡초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집에서 말린 뒤 먼저 드로잉으로 옮겨집니다. 그다음 그라운드를 바른 검은 동판 위에서 날카로운 니들이 그 선을 다시 긋습니다. 엉킨 선묘 사이에는 일상의 이야기가 숨듯이 들어가고, 자아를 상징하는 꽃과 나비, 항아리가 함께 앉습니다.
그리고 부식이 옵니다.
"염화제이철이라는 약품 안에 동판을 담그고 판에 그린 동그란 모양을 뜯어내기 위해 며칠을 넣었다 빼는 인고의 과정을 보낸다. 이 또한 우리네 인생에서 고난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 권신애 작가노트, 2021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입니다. 담갔다 꺼내 보고 다시 담그는 시간이 판에 쌓입니다. 작가는 완성된 판을 색을 넣어 종이에 찍기도 하고, 때로는 동판 자체를 완성품으로 내놓기도 한다고 밝혔습니다.
몸을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2017년 2인전의 작품 설명에서 권신애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에게 작업은 특히 동판화 작업은 늘 고통스럽다. 동판을 자르고 부식시키고 니들로 손목 인대가 늘어날 정도로 긋고, 무거운 동판을 들고 지하로 옥상으로 오르내리는 작업은 늘 여성으로서 육체적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 권신애 작품설명, 2017
고된 일을 왜 하느냐는 물음도 그 글에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그리면 안 되느냐는 조언을 듣는다고 했고, 그러면서도 동판과 벌이는 씨름에서 "늘 이기고" 싶다고 썼습니다. 판 위의 선 하나하나가 그 씨름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항아리라는 그릇
권신애의 화면에서 항아리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작가 소개문은 항아리를 "평범한 일상에서 발굴한 유물 같은 형태"이자 어머니의 상징인 여성성을 담는 그릇으로 설명합니다. 평론가 임대식은 그 항아리를 두고 "품는다, 그리고 다시 되돌린다"는 뜻을 지닌 여성성의 근원적 상징이라고 읽었습니다. 판화가가 스스로 밝힌 뜻도 겹칩니다. 항아리는 우리 부모 세대 이전부터 일상을 담아온 도구라는 것입니다.
같은 소개문에서 선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습니다. 복잡한 일상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 무의식의 시간은 하나의 큰 뜻, 곧 치유로 모입니다. 새벽기도를 다니며 가슴의 응어리를 토해내는 일상을 "일기 같은 선"으로 항아리 안의 붉은 꽃봉오리에 풀어냈다는 대목도 2017년의 작품 설명에 있습니다.
항아리 안에 삶을 담고, 삶을 담은 선을 동판에 새기고, 그 판을 며칠씩 부식에 맡기는 것. 권신애의 작업은 이 세 겹으로 읽힙니다.
〈바람의 기억〉 — 항아리에 오윤이 들어오다

- 34x47cm · Etching and Linoleum, Monotype · 2026 · ₩1,200,000
- 작품 페이지 →
2026년의 이 작품에는 새 요소가 하나 들어와 있습니다. 작가의 말입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항아리 형상에 덩굴과 풀의 이미지를 새겨 넣은 작품으로 우리의 삶과 자연이 이어지는 모습들 사이에 오윤의 인물들을 작게 찍어내어 오윤만의 정신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도판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말이 화면에서 그대로 확인됩니다.
몸통의 오른쪽에서는 청록색 덩굴이 양치식물 잎처럼 가지를 벌리며 위로 올라갑니다. 왼쪽에서는 같은 선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말려 들어갑니다. 잎맥 한 줄 한 줄이 은회색으로 도드라지고, 그 사이를 더 가느다란 선들이 메웁니다. 니들로 판에 긋고 산에 물려 깊어진 선의 질감이 종이 위에서 오돌토돌하게 살아 있습니다. 주운 잎의 결이 판에 새겨진 흔적이 이 항아리 몸통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색은 분홍과 보라, 하늘색이 번지고 겹치며 자리를 옮깁니다. 곳곳에 종이 바탕이 그대로 드러난 흰 자리가 뚫려 있어, 항아리 속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자리는 매끈하지 않습니다. 붉은 녹빛으로 거칠게 일어난 윤곽이 항아리를 종이 위에 눌러 앉힌 흔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가리의 타원에는 잔선이 촘촘히 감겨 있습니다.
그리고 붉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항아리 오른쪽 어깨 위에 하나, 왼쪽 덩굴 가지에 하나, 왼쪽 아래 소용돌이 옆에 웅크린 것이 하나, 바닥 가까이 덩굴이 모이는 자리에 여럿. 크기는 모두 손톱만 하고 색은 인주처럼 붉습니다. 도장을 눌러 찍은 것처럼 화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서, 덩굴 사이를 지나다 문득 마주치는 사람들 같습니다. 작가의 말대로 "작게 찍어낸" 오윤의 인물들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택한 방식도 밝혔습니다.
"거칠고 힘 있는 선 대신 섬세하게 반복되는 선을 통해 민중의 한과 신명, 그리고 생명력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었다."
오윤의 판화가 목판의 굵고 힘센 칼선으로 이름났다면, 권신애는 동판의 가는 선을 쌓는 쪽을 택했습니다. 거친 선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 판화의 문법으로 같은 것을 말하려는 자리입니다. 은은한 색과 장식적인 문양이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한국적 정서를 담는다고 했고,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오윤의 정신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의 조형 언어를 바탕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시선과 감성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다."
재료는 에칭과 리노, 그리고 모노타입입니다. 동판의 부식 선에 리놀륨 판을 더하고, 한 번만 찍히는 모노타입의 색이 얹혔습니다. 같은 그림을 여러 장 찍어낼 수 없는 방식이라 이 화면은 단 한 장입니다. 앞서 소개한 "단 한 장의 판화만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는 그대로 사실이 됩니다.
주운 잎에서 시작한 선이 항아리를 오르고, 그 사이에 오윤의 인물이 앉습니다. 작가가 오랫동안 자아를 담아온 그릇이 이번에는 한 시대의 사람들까지 품게 된 셈입니다. 제목의 '바람'은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고, '기억'은 항아리에 새겨진 것입니다.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온라인관에서
〈바람의 기억〉은 씨앗페 온라인관에서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과 함께 소개됩니다. 오윤이 새긴 판화 전작 187종을 한자리에 모으는 전시입니다. 다른 판화가가 오윤을 마주하고 만든 동판 작품이 그 곁에 걸린다는 점이 이 작품의 자리를 특별하게 합니다. 오윤의 목판과 나란히 놓고 보면, 굵은 선과 가는 선이 서로를 다르게 비춥니다.
가까이서 보시길 권합니다. 도판의 작은 붉은 사람들은 화면 앞에 서야 하나씩 찾아집니다.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안내에서 전시 정보를 볼 수 있고, 권신애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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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권신애는 어떤 작가인가요? A.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1994)와 같은 대학 대학원 판화과(1997)를 졸업한 판화가입니다. 30여 년간 동판화를 주로 했고, 개인전 18회와 100회 이상의 그룹전·아트페어에 참여했습니다. 2025년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문 전시에서 성신판화회 회장으로 소개됐습니다.
Q.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나요? A. 작가노트에 따르면 길가에서 주운 나뭇잎과 잡초를 말려 드로잉한 뒤, 그라운드를 바른 동판 위에 니들로 새깁니다. 이후 염화제이철에 동판을 며칠씩 담갔다 빼며 부식시킵니다. 완성된 판은 색을 넣어 종이에 찍기도 하고, 동판 자체를 작품으로 내놓기도 합니다.
Q. 〈바람의 기억〉은 어떤 작품인가요? A. 항아리 형상에 덩굴과 풀을 새기고 그 사이에 오윤의 인물들을 작게 찍어 넣은 2026년 작품입니다. 재료는 Etching and Linoleum, Monotype, 크기는 34x47cm이며, 가격은 ₩1,200,000입니다.
Q. 〈바람의 기억〉은 오윤을 어떻게 해석했나요? A. 작가는 오윤의 거칠고 힘 있는 선 대신 섬세하게 반복되는 선으로 민중의 한과 신명, 생명력을 풀어냈다고 밝혔습니다. 오윤의 정신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의 조형 언어를 바탕으로 오늘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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