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여대에서 판화를 익히고 메조틴트와 드라이포인트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새겨온 판화가 이순희.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에 부친 작품 〈꿈〉 한 점을 도판과 함께 읽습니다.
이순희 — 메조틴트로 새긴 꿈, 오윤에게 보내는 애도

이순희가 씨앗페에 낸 작품은 단 한 점입니다. 제목은 〈꿈〉. 2019년, 드라이포인트, 26.7x33cm. 작품 옆에 붙은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작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인간은 자신의 이상세계를 늘 꿈꾸며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름 하나가 등장합니다. "오윤의 삶 또한 자신의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한 점의 판화로 한 작가를 전부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한 점은 이순희가 오랜 시간 다뤄온 매체와 주제, 그리고 이번 전시에 그가 부친 이유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판은 작고, 담긴 것은 작지 않습니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판화로 남은 사람
이순희는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과 같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졸업했습니다. 그가 직접 쓴 소개 글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저는 판화가 이순희입니다. 성신여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회화및 판화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며 개인전 9회및 단체전 참여활동을 하고있습니다."
전공은 서양화였지만 그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것은 판화입니다. 캔버스에 붓을 얹는 회화와, 금속판을 긁고 눌러 이미지를 새기는 판화는 손을 쓰는 방식부터 다릅니다. 회화가 화면 위에 얹어가는 작업이라면, 판화는 판을 파내거나 긁어 만든 자국에 잉크를 채우고 압력을 가해 찍어내는 작업입니다. 이순희는 그림 그리는 법을 먼저 배운 뒤, 판을 새기는 쪽에 남았습니다.
그가 개인전을 아홉 차례 열고 참여해온 단체전의 이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성신판화전, 한국현대판화가정기전, 서울국제판화공모전, 대한민국전, 프린트미디아전, 한일프린트전, 한국신세대판화전, 아이비자그래픽비엔날레, 델벨로국제소형미술제, 서울판화도시탐험전, 서울판화미술제, 서울미술대전, 내일의판화전, 예술가가만든책전, 부산판화비엔날레, 한미국제미술교류전, 장서표전, 인사동판화축제. 스무 개에 가까운 이름 가운데 태반이 '판화'라는 두 글자를 달고 있습니다. 국내 판화공모전과 국제 판화비엔날레, 서울과 부산의 판화 행사, 장서표(책의 주인을 표시하는 작은 판화)와 판화책 전시까지 — 이순희의 활동 반경은 한국 현대 판화가 열어온 크고 작은 자리를 거의 다 지나온 궤적에 가깝습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세 자리
이 긴 목록 가운데 세 개의 전시는 당시 기사와 아카이브 기록으로 날짜와 장소까지 확인됩니다.
가장 이른 것은 1996년입니다. 조선일보 그해 11월 15일자 미술전시안내에 "내일의 판화전"이 소개됩니다. 인사갤러리와 단성갤러리, 갤러리 사비나에서 13일부터 19일까지 열린 이 전시에 출품한 작가 명단에 이순희의 이름이 있습니다.
1999년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예술가가 만든 책전"이 열립니다. 부제는 '판화·예술·책전'. 2월 12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이 전시는 강동석을 비롯한 판화가들이 모여 판화 기법으로 만든 책, 아티스트 북을 선보인 자리였고, 참여 작가 명단에 이순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록은 예술출판 아루트가 펴냈고, 홍익대 판화과 교수 임영길이 "예술가가 만든 책을 발간하며…"라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서울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제29회 성신판화展. 이 전시의 작가 명단에는 이순희와 함께 방인희, 조교연의 이름도 나란히 있습니다. 세 사람이 같은 학교의 판화 동문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이듬해인 2012년 10월, 갤러리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성신판화 30주년 기념展'에도 이순희의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성신대학원 판화과가 서른 해를 맞아 동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전시였습니다.
세 자리의 성격은 조금씩 다릅니다. 1996년의 "내일의판화전"은 여러 화랑이 함께 연 그룹 기획전이었고, 1999년의 "예술가가만든책전"은 판화를 책이라는 형식으로 확장한 실험적 기획전이었으며, 2011년과 2012년의 성신판화展은 같은 학교에서 판화를 배운 동문들이 스스로 모인 자리였습니다. 여러 화랑이 함께 여는 자리, 실험에 참여하는 자리, 동문으로 모이는 자리 — 이순희는 이 세 종류의 자리를 모두 거쳐왔습니다.
메조틴트와 드라이포인트 — 새기지 않고 문지르는 판화
이순희가 주로 쓰는 두 기법은 메조틴트와 드라이포인트입니다. 그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메조틴트작업과 드라이포인트 작업을 주로 하며 주제는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판화의 여러 기법 가운데서도 이 둘은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축에 속합니다. 목판화가 칼로 나무를 파내 형태의 윤곽을 남기는 기법이라면, 드라이포인트는 뾰족한 바늘로 금속판 표면을 직접 긁어 선을 만드는 기법입니다. 긁힌 자국 양옆으로 밀려 올라온 금속 부스러기(버burr)가 잉크를 머금어, 다른 판화 기법에서는 보기 힘든 부드럽고 번지는 듯한 선이 나옵니다. 메조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판 전체를 촘촘한 요철로 뒤덮어 놓고 — 그대로 찍으면 균일한 검은 면이 나올 만큼 — 밝게 할 부분을 도구로 문지르고 눌러서 지워나가는 방식입니다. 선을 더하는 게 아니라 어둠을 걷어내며 형태를 드러내는 셈입니다.
이순희의 판화가 다른 목판화나 에칭과 다르게 느껴진다면 이 때문입니다. 윤곽선으로 형태를 가두는 대신, 무수한 짧은 선과 미세한 음영의 계조가 화면을 채웁니다. 사람의 얼굴이든 구름이든, 또렷한 경계 대신 촘촘한 결로 이루어진 표면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결이 향하는 곳은 그가 직접 밝힌 대로 "인간의 내면세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보다, 그 안쪽의 결을 새기는 기법을 오래 골라온 셈입니다.
〈꿈〉을 읽다
씨앗페에 낸 〈꿈〉은 세로로 긴 화면을 세 층으로 나눠 씁니다.
화면 아래쪽 절반은 한 인물의 머리와 어깨입니다. 눈은 감겨 있고 고개는 살짝 숙어 있습니다.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이 스친 듯 몇 가닥이 위로 흐트러져 있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옷이 몸을 감쌉니다. 표정에 긴장이 없습니다. 잠든 얼굴이라기보다, 눈을 감은 채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얼굴에 가깝습니다.
그 머리 위, 화면 중앙에 작은 형상이 하나 떠 있습니다. 잔이나 받침 같은 것 위에 놓인 꽃 한 송이입니다. 인물의 정수리에서 곧장 위로 솟아오른 자리에 놓여, 이 인물이 감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화살표처럼 읽힙니다.
그 꽃 위로 화면 상단 전체를 차지하는 큰 원이 있습니다. 태양처럼 사방으로 빛줄기를 뻗는 이 원 안에는 구름이 몇 겹으로 둘러 있고, 그 한가운데 구름 위에 나체의 여성이 서 있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잔 같은 것을 받쳐 들고, 그 위로 날개를 편 새 한 마리가 내려와 그것을 받습니다. 새와 잔은 가느다란 선 하나로 이어져 있어, 잔이 새에게 전해지는 순간처럼도, 새가 잔을 매달아 올리는 순간처럼도 보입니다. 여성이 선 자리 아래로는 두 갈래의 긴 빛줄기가 대각선으로 뻗어 내려와 화면 아래쪽 수평선(바다로도 읽히는 물결 위)에서 좁혀듭니다. 그 빛줄기가 만나는 자리 근처에는 작은 인물 하나가 떨어지듯 떠 있는 것도 보입니다.
세 층을 다시 이으면 이렇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머리 위로 이상을 상징하는 작은 형상(꽃)이 떠오르고, 그 너머 더 큰 원 안에서는 인간(여성)과 초월적 존재(새)가 잔을 사이에 두고 만납니다. 제목이 〈꿈〉인 이유가 화면 구조 자체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물이 눈을 감고 보고 있는 장면, 그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이상세계입니다.
작가의 글은 이 이미지를 오윤에게로 연결합니다. "평생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몸짓으로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민중의 삶을 감싸안고 숭고한 노동의 숨결을 찬양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나는 이 그림으로 짧았지만 강렬하고 눈부신 그의 삶에 깊은 애도와 존경을 표현하고자 한다." 화면 속에서 눈을 감고 이상을 꿈꾸는 인물은, 그러므로 오윤이 평생 붙들었던 '이상세계를 향한 노력'에 대한 이순희 나름의 초상으로도 읽힙니다. 구체적인 얼굴을 그리는 대신, 이상을 향해 눈을 감은 사람의 형상으로 그 마음을 옮겨온 것입니다.
오윤과 이순희, 두 판화가의 거리
오윤은 목판화로 널리 알려진 작가입니다. 칼로 나무를 깊게 파내 굵고 단호한 선을 남기고, 그 선으로 민중의 얼굴과 노동하는 몸을 새겼습니다. 그의 판화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윤곽과 강한 흑백 대비로 기억됩니다.
이순희의 메조틴트와 드라이포인트는 정반대의 손놀림에 가깝습니다. 굵은 칼자국 대신 무수한 가는 선과 미세한 음영이 화면을 채우고, 형태는 또렷한 경계보다 촘촘한 결로 드러납니다. 오윤이 파내는 판화가였다면 이순희는 문지르고 긁어내는 판화가입니다. 같은 판화라는 장르 안에서도 두 사람이 쓰는 도구와 손의 움직임은 서로 다른 결을 냅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오윤이 평생 그린 것이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 이상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몸짓이었다면, 이순희가 〈꿈〉에서 그린 것도 결국 이상세계를 향한 인간의 꿈입니다. 다루는 대상은 다르지만 — 오윤은 현장의 민중을, 이순희는 눈을 감은 한 개인의 내면을 — 그 끝에서 두 사람이 붙드는 것은 같은 단어, '이상세계'입니다. 기법의 거리만큼, 그 거리를 좁히는 주제의 겹침도 뚜렷합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이순희가 낸 작품은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온라인관에 걸려 있습니다. 이 전시는 씨앗페의 다른 상설 갤러리 출품작과는 다른 결을 갖습니다. 오윤이 새긴 판화 원판으로 후쇄된 작품들이 유족의 뜻에 따라 오랜만에, 혹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이고, 이순희를 비롯한 여러 판화가들이 그 곁에서 오윤에게 부치는 오마주를 함께 걸었습니다.
메조틴트와 드라이포인트로 수십 년째 판을 다뤄온 판화가가, 목판으로 시대를 새긴 판화가에게 한 점의 판화로 화답한 것입니다. 도구는 다르지만 방법은 같습니다. 판을 새기고, 찍어내고, 그 안에 담고 싶은 것을 남기는 일. 〈꿈〉은 그 방법으로 이순희가 오윤에게 건넨 애도이자 존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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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이순희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판화 작업을 지속해온 판화가입니다. 개인전 9회를 열었고, 성신판화전·한국현대판화가정기전·서울국제판화공모전·부산판화비엔날레 등 다수의 판화 단체전에 참여해왔습니다.
Q. 주로 어떤 판화 기법을 쓰나요? A. 메조틴트와 드라이포인트를 주로 씁니다. 드라이포인트는 바늘로 금속판을 직접 긁어 선을 만드는 기법이고, 메조틴트는 판 전체를 요철로 덮은 뒤 밝은 부분을 문질러 지우며 형태를 드러내는 기법입니다. 두 기법 모두 또렷한 윤곽선보다 촘촘한 선과 미세한 음영으로 화면을 채웁니다. 작가는 "주제는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고 밝혔습니다.
Q. 성신판화전 참여는 어떻게 확인되나요? A. 2011년 서울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 제29회 성신판화展과 2012년 갤러리 팔레 드 서울에서 열린 '성신판화 30주년 기념展'의 작가 명단에 이순희의 이름이 있습니다. 두 전시 모두 성신여대 판화과 동문들이 모인 자리였고, 2011년 명단에는 방인희·조교연 등 동문의 이름도 함께 있습니다.
Q. 씨앗페에 낸 작품은 무엇인가요? A. 〈꿈〉(2019, 드라이포인트, 26.7x33cm) 한 점입니다. 눈을 감은 인물의 머리 위로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장면이 겹쳐지는 구성으로, 작가는 이 작품을 오윤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담아 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작가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Q. 이 작품은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A. 이순희는 오윤의 사후 판화 원판으로 후쇄된 작품들이 모이는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온라인관에 〈꿈〉을 부쳤습니다. 작품 설명에서 그는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몸짓으로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민중의 삶을 감싸안고 숭고한 노동의 숨결을 찬양"한 오윤의 삶에 "깊은 애도와 존경을 표현하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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