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이수자 정찬민은 절의 경판부터 참사 희생자의 이름까지 칼로 새겨왔습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목판 다섯 점을 따라 읽습니다.
정찬민 — 칼로 그리는 사람,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이수자의 목판

한 구의 해골이 앉아 있습니다. 다리를 반쯤 포개고,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붙인 채입니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반가사유상의 자세 그대로인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살이 없습니다. 머리에는 관이 얹혀 있고 허리 아래로는 주름진 천이 흘러내립니다. 뼈만 남은 손가락이 뺨을 짚는 그 동작만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정찬민의 〈무제〉입니다. 그림이 아니라 새긴 것입니다. 나무를 파서 형태를 남기는 일, 이것을 각자(刻字)라고 합니다.
각자 — 칼끝으로 쓰는 글씨
각자는 나무나 돌 같은 재료에 글자나 문양을 새기는 기술입니다. 뉴시스는 이 기술이 1996년 무형유산 전통기술 종목으로 지정됐다고 전합니다. 팔만대장경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손으로 파낸 목판이 있었기에 책이 만들어졌고, 그 목판을 만드는 사람이 각자장이었습니다.
정찬민은 이 종목의 이수자입니다. 여러 매체가 그를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이수자'로 지칭해왔습니다. 2024년 8월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국가유산진흥원은 그해 9월 국가무형유산전수교육관에서 '제14회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사제동행기획전'을 열었고, 각자장 보유자 김각한과 함께 정찬민을 포함한 이수자들, 그리고 전수생들이 현판과 시전지 목판, 벽걸이 편액 등 70여 점을 내놓았습니다. 사제동행이라는 전시 제목이 이 분야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보유자가 있고, 그에게 배워 기술을 잇는 이수자가 있고, 다시 그 아래 전수생이 있습니다.
기술을 물려받은 사람은 대개 그것을 다시 내줍니다. 정찬민의 이름이 신문에 가장 자주 등장한 자리도 전시장이 아니라 교실이었습니다.
청계사 경판학교 — 배운 기술을 다시 내어놓는 자리
경기 의왕의 청계사는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묘법연화경과 오대진언 같은 경전은 물론 천자문 내용까지 담긴 목판입니다. 이 목판을 활용해 지역 주민이 직접 경판을 새겨보는 프로그램이 여러 해 이어졌고, 그 지도를 정찬민이 맡았습니다.
2021년 10월, 청계사는 사흘간 여덟 차례에 걸쳐 체험 프로그램을 열었습니다. 글로벌뉴스통신 보도에 따르면 가족 단위로 참가한 주민들이 산벚나무로 만든 경판에 글자를 새기고 에코백과 티셔츠에 찍어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찬민이 한 말이 기사에 남아 있습니다.
"청계사 천자문 목판과 부처님 말씀이 담긴 경전으로 사용되는 산벚나무는 어디서나 구하기 쉬우며 결의 짜임이 좋고 단단해 경판해 적합하다." — 글로벌뉴스통신, 2021년 10월 6일
나무를 고르는 기준이 먼저입니다. 구하기 쉬울 것, 결이 촘촘할 것, 단단할 것. 어느 것 하나 미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칼이 들어가는 재료를 다루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그는 이 체험이 "불교전통공예에 담긴 지혜와 슬기를 배우고 '참 나가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듬해와 그 다음 해에도 프로그램은 이어졌습니다. 2022년 8월 청계사는 '이야기 인쇄소 프로그램(경판학교)' 수료식을 열어 열두 명에게 수료증을 주었고, 주지 성행 스님은 법보신문에 "문화유산의 가치를 함께 만들어 가는 데 아낌없이 지도해주신 국가무형문화재 정찬민 각자장님"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2023년 3월에는 대상이 바뀝니다. 법보신문과 경기일보 보도에 따르면 청계사는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녹향원에서 거주자 열다섯 명을 대상으로 경판학교를 열었고, 정찬민이 각자 기술을 지도했습니다. 목표는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참여자들이 청계사 일대에 세울 경판 형식의 안내판을 실제로 제작할 수 있게 하는 인력 양성이었습니다. 녹향원 김나현 원장은 법보신문에 "기술을 연마해 경제활동으로 이어져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준 청계사에 감사함을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술을 가진 사람이 그 기술을 가장 필요한 자리에 가져가는 일. 정찬민이 씨앗페에 작품을 낸 이유를 이해하려면 이 대목을 먼저 읽는 편이 빠릅니다.
작가가 밝힌 판각의 목록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에는 그가 새겨온 것들의 목록이 적혀 있습니다. 한양도성도(3.60m×5.30m)와 전주지도(1.90m×1.90m) 같은 대형 판각, 노무현·부시 대통령의 초상 판각, 노무현 시민센터 개관 초청전시, 아시아 목판(인출) 협회 한국측 작가 이력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목록의 끝에 두 줄이 더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판각, 이태원 참사 희생자 판각.
도성의 지도와 사람의 얼굴과 희생자의 이름이 한 목록에 나란히 있습니다. 다른 재료를 쓴 것도 아니고 다른 칼을 쓴 것도 아닙니다. 같은 나무에 같은 방식으로 새겼습니다. 판각이라는 기술의 성격이 여기 드러납니다. 새긴 것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종이에 쓴 글씨는 태우면 없어지지만, 파낸 자리는 파낸 채로 남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을 다루는 데 이보다 정직한 재료를 찾기 어렵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다섯 점 읽기
씨앗페에 들어온 정찬민의 작품은 다섯 점입니다. 〈무제〉 한 점을 빼면 모두 2026년에 만들어진 판각이고, 그 네 점은 오윤의 그림을 목판으로 되새긴 것입니다. 오윤은 한국 현대 목판화의 대표적인 이름이고, 정찬민의 작업은 그 판화의 화면을 다시 나무에 새겨 넣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작품을 볼 때 한 가지를 먼저 알아두면 좋습니다. 여기 걸리는 것은 찍어낸 종이가 아니라 새겨진 나무판 자체입니다. 판화가 결과물이라면 이것은 그 결과물을 낳는 몸입니다.
〈무제〉 — Woodcut, 29x63x3cm
세로로 긴 판입니다. 두께가 3cm 적혀 있는 것이 이 작품의 성격을 알려줍니다. 평면이 아니라 부피를 가진 물건입니다.
화면에는 앞서 본 해골이 앉아 있습니다. 검은 선으로 뼈마디 하나하나가 새겨졌고, 갈비뼈와 척추와 손가락 마디가 모두 셀 수 있을 만큼 또렷합니다. 배경은 나뭇결이 세로로 길게 흐르는 옅은 색 면입니다. 결이 그대로 보이는 바탕 위에 검은 형상이 얹혀 있어, 인물과 나무가 서로를 감추지 않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에 붙인 작업 노트가 있습니다.
"겉치레와 허상을 깎아내고 오직 뼈대만 남긴 표현은, 화려한 물질문명 속에서 진짜 본질과 실존을 묻는 오윤 특유의 칼끝 같은 직시와 맞닿아 있습니다. 피와 살이 다 타버려 백골이 되어서도 손가락을 뺨에 댄 채 멈추지 못하는 이 사유는, 어쩌면 매일 불안과 피로 속을 버텨내는 우리 모두의 처절하면서도 지독한 삶의 한 장면을 표현했습니다." —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깎아낸다'는 말이 두 뜻으로 동시에 읽힙니다. 겉치레를 깎아내는 일이고, 칼로 나무를 깎아내는 일입니다. 판각에서 남는 것은 파내지 않은 부분입니다.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일이 곧 무엇을 버릴지 정하는 일입니다.

- 29x63x3cm · Woodcut · ₩2,000,000
- 작품 페이지 →
〈오윤 상〉 — 2026년, 판각, 29x48cm
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머리카락이 넓게 부풀어 올랐고, 시선은 화면 밖 왼쪽을 향합니다. 눈가와 광대와 턱선에 잔 칼자국이 촘촘히 박혀 명암을 만듭니다. 파인 자리와 남은 자리의 대비로만 얼굴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붉은 낙관이 하나 찍혀 있습니다.
초상을 판각으로 새기는 일은 붓으로 그리는 일과 다릅니다. 선을 다시 그을 수 없습니다. 한 번 파낸 자리는 되돌릴 수 없으므로, 얼굴의 인상은 칼을 대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어야 합니다. 이 작품을 가까이서 보시길 권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의 방향마다 칼이 한 번씩 들어갔습니다.

- 29x48cm · 판각 · ₩1,5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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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목판-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 — 2026년, 판각, 29x48cm
판 위쪽에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이라는 글자가 한글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아래로 수십 명의 사람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춤추는 사람, 북을 멘 사람, 팔을 크게 벌린 사람, 뒤로 젖혀 웃는 사람. 오른쪽 아래에는 삼각형 틀에 매단 깃발이 있고 거기 '春無仁 秋無義'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붉은 낙관이 찍혀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판각은 어려워집니다. 인물 하나마다 윤곽선을 살려두고 그 사이를 전부 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화면에서 파내지 않은 부분은 사람의 몸을 이루는 가는 선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칼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다섯 점 가운데 가장 오래 걸렸을 작품으로 보입니다.

- 29x48cm · 판각 · ₩1,500,000
- 작품 페이지 →
〈재현 목판- 북〉 — 2026년, 판각, 48x29cm
가로로 누운 판입니다. 앞의 두 점과 크기는 같고 방향만 다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북이 중심에 놓인 화면이며, 가로 화면이라 벽에 걸었을 때 옆으로 펼쳐지는 리듬을 갖습니다.

- 48x29cm · 판각 · ₩1,500,000
- 작품 페이지 →
〈재현 목판-오윤 상, 소리꾼 등〉 — 2026년, 판각, 48x29cm
가로 판에 여러 장면을 함께 새긴 작품입니다. 제목이 '오윤 상'과 '소리꾼'을 나란히 부르고 '등'으로 끝나는 데서 알 수 있듯, 한 판 안에 복수의 도상이 들어 있습니다. 〈오윤 상〉과 나란히 걸면 같은 얼굴이 단독으로 있을 때와 여럿 사이에 있을 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볼 수 있습니다.

- 48x29cm · 판각 · ₩1,500,000
- 작품 페이지 →
네 점의 판각은 모두 ₩1,500,000이고 〈무제〉만 ₩2,000,000입니다. 정찬민 작가 페이지에서 다섯 점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목판을 집에 들인다는 것
판화를 사는 일과 목판을 사는 일은 다릅니다. 판화는 종이이고, 목판은 나무입니다. 액자 유리 뒤에 평평하게 눕는 것이 아니라, 두께를 가진 물건이 벽에 붙습니다. 빛이 비스듬히 들면 파인 자리마다 그림자가 생겨 같은 작품이 시간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관리도 종이와 다릅니다. 나무는 습도에 반응합니다. 직사광선과 난방기 바로 앞을 피하고, 건조한 계절에 지나치게 마르지 않도록 살피면 됩니다. 대신 나무는 오래갑니다. 절의 경판이 수백 년을 견딘 이유가 그것입니다.
한국 현대 판화의 지형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씨앗페에는 목판, 동판, 석판을 다루는 여러 계보의 작가가 함께 들어와 있고, 정찬민의 자리는 그 가운데서도 조금 특별합니다. 그는 찍어낸 화면이 아니라 찍어내는 도구를 작품으로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정찬민이 씨앗페에 다섯 점을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배운 기술을 지적장애인 거주시설의 교실로 가져가 자립의 도구로 건넨 사람이, 동료 예술인을 위해 작품을 내놓는 일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처음 만나는 분이라면 순서를 이렇게 잡아보시길 권합니다. 먼저 〈무제〉의 뼈마디를 보십시오. 이 사람의 칼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거기 다 있습니다. 다음으로 〈오윤 상〉의 얼굴을 보십시오. 한 번 파내면 되돌릴 수 없는 재료로 사람의 인상을 잡아낸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재현 목판-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 앞에 서십시오. 그 많은 사람을 전부 남겨두기 위해 얼마나 많이 파냈는지를 헤아려보면, 이 작가가 일하는 시간의 단위가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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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정찬민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이수자입니다. 각자(刻字)는 나무나 돌에 글자와 문양을 새기는 전통 기술이며, 여러 매체가 그를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이수자'로 소개해왔습니다. 경기 의왕 청계사의 경판학교에서 여러 해 지도를 맡아 지역 주민과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거주자들에게 각자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Q. 각자(刻字)란 무엇인가요? A. 나무나 돌 등 각종 재료에 글자나 문양을 새기는 것입니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1996년 무형유산 전통기술 종목으로 지정됐습니다. 현판, 편액, 경판 같은 것이 각자의 산물입니다.
Q. 출품작은 판화인가요, 목판인가요? A. 목판입니다. 찍어낸 종이가 아니라 새겨진 나무판 자체가 작품으로 나왔습니다. 〈무제〉는 두께가 3cm로 표기돼 있어 부피를 가진 물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Q. 작품에 오윤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이유는? A. 네 점의 판각이 한국 현대 목판화의 대표적 작가인 오윤의 그림을 목판으로 되새긴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무제〉의 작업 노트에서 "진짜 본질과 실존을 묻는 오윤 특유의 칼끝 같은 직시"를 언급했습니다.
Q. 작가가 새겨온 것들은 어떤 것인가요? A.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에 따르면 한양도성도(3.60m×5.30m)와 전주지도(1.90m×1.90m) 같은 대형 판각, 노무현·부시 대통령 초상 판각,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 판각이 있습니다. 노무현 시민센터 개관 초청전시에 참여했고 아시아 목판(인출) 협회 한국측 작가로도 소개돼 있습니다.
Q. 정찬민 작품 가격대는? A. 판각 네 점은 각 ₩1,500,000, 〈무제〉는 ₩2,000,000입니다.
Q. 목판 작품은 어떻게 관리하나요? A. 나무는 습도에 반응합니다. 직사광선과 난방기 바로 앞을 피하고 지나치게 건조한 환경만 피하면 됩니다. 종이와 달리 빛의 각도에 따라 파인 자리의 그림자가 달라져, 같은 작품이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Q. 정찬민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정찬민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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