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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국 — 자동차를 문질러 떠내는 판화가, 그리고 1980년의 버스 한 대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년 9월 21일 · 씨앗페

프로타주로 자동차를 실물 크기 그대로 떠내 온 판화가 정명국. 가면이자 기억의 저장소였던 그 소재가 실크스크린 한 장의 시내버스로 옮겨 앉기까지를 따라 읽습니다.

정명국 — 자동차를 문질러 떠내는 판화가, 그리고 1980년의 버스 한 대

정명국, 〈블루 1980〉, silkscreen print, 40x30cm — 푸른 빛무리 속에 떠 있는 시내버스 한 대
정명국, 〈블루 1980〉, silkscreen print, 40x30cm — 푸른 빛무리 속에 떠 있는 시내버스 한 대

가로 40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종이입니다. 거의 전부가 비어 있습니다. 미세한 점들이 고르게 뿌려진 크림빛 바탕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크기로 시내버스 한 대가 놓여 있습니다.

버스 둘레에는 푸른 선들이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 빛무리를 이룹니다. 버스 자체는 검게 인쇄됐고, 창문과 차체 아래쪽에는 분홍·노랑·연두가 얇게 얹혀 있습니다. 창 안으로 승객들의 형체가 비치고, 열린 앞문 쪽에는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 서명과 함께 'II/III'라는 에디션 표기가 적혀 있습니다. 세 장 중 두 번째라는 뜻입니다.

작은 화면에 더 작은 버스. 이 비례가 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실마리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정반대의 일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실물 크기로 떠내는 사람

정명국은 1968년에 태어났습니다. 세종대학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2010년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작가로 그를 선정하면서 정리한 약력과, 2024년 울산제일일보가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 출품작가를 소개하면서 적은 학력이 서로 일치합니다.

그를 알린 것은 프로타주(frottage)였습니다. 대상 위에 종이를 밀착시키고 흑연이나 색연필로 문질러 그 표면을 그대로 떠내는 기법입니다. 정명국이 이 기법으로 떠낸 대상은 줄곧 하나, 자동차였습니다.

2010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ON MASK》의 서문에서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조주현은 이 작업의 물리적 조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먹물이나 물감 등으로 어둡게 칠한 바탕 위에 흑연 덩어리 연필 또는 칼라펜슬로 대상(자동차)의 부분을 반복적으로 문질러 떠낸 수 십장의 판화지를 연결시켜 실제 크기의 자동차 표면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놓는 (중략) 대상의 형태가 정확하게 드러나면서도 매끈한 표면의 질감이 표현될 수 있도록 몇 주 동안 밤낮없이 매달리는 인고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 — 조주현(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ON MASK》 서문

전시장에 실물 크기의 자동차 표면이 종이로 서 있는 광경입니다. 한 점에 몇 주가 걸립니다.

왜 자동차인가

같은 서문은 작가가 밝힌 이유를 인용합니다.

"자동차는 갑옷과 같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 존재로, 위엄의 상징으로,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자동차는 가면과 같이 우리를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시켜주었다. 헐크로 변하게도 하고 수퍼맨으로도 변신하게 해 주었으며 선한 천사로도 변하게 해 주었다."

작가 본인의 글은 더 짧습니다. 에코락갤러리에 실린 작가 소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동차는 우리의 가면이다." 그리고 이어집니다.

"자동차의 핸들을 잡는 순간 다른 모습이 서서히 일어나서 억눌렸던 감정과 행동이 드러난다. (중략) 우리들이 자동차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빠른 스피드, 남보다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 우월감, 작고 소심한 모습을 감추고 싶은 마음,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려는 욕망일까?" — 정명국, 에코락갤러리 작가 소개

다만 그는 자동차 애호가로 읽히는 것은 사양합니다. 같은 글의 끝부분입니다.

"나의 작업에서 자동차가 등장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차를 무척 좋아하시는 군요!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차를 좋아하지만 보통사람들 정도만 좋아한다. 더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과 물체 그 대상에 빠져드는 사람들이다."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빠져드는 사람. 그래서 차종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ON MASK》에서는 국내 중소기업이 10여 년에 걸쳐 자체 제작한 수제 스포츠카를 세 방향에서 실물 크기로 떠냈고, 동시에 10년 넘게 탄 자기 가족의 차를 색연필로 떠내 갈색 톤의 화면으로 만들었습니다. 욕망의 정점과 생활의 밑바닥을 같은 기법으로 나란히 놓은 셈입니다.

흔적이라는 방법

판화가 박광열은 2009년 문화일보갤러리 개인전 《사고의 받아쓰기 2》의 글에서 프로타주가 일반적인 판화와 어떻게 다른지를 짚었습니다.

"프로타주는 대상에 직접 접촉해야 한다는, 대상과의 거리가 제로일 때 그 이미지가 성립된다. 따라서 프로타주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인 대상과 결과는 1:1의 크기와 공간으로 전환되며 보여주기 위해서도 같은 크기의 공간이 필요하다." — 박광열(판화가), 《사고의 받아쓰기 2》 서문

거리가 0인 회화. 눈으로 보고 옮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며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글은 그래서 이 작업이 한 번뿐이라고 적습니다. "프로타주는 또 다시 올 수 없는 단한번의 경험인 것이다."

이 글은 정명국이 떠내 온 차종의 목록도 남겨 두었습니다. 1950년대의 시발택시, 1970년대의 포니와 브리사, 산업화의 앞줄에 있던 삼륜 용달과 트럭들, 그리고 버려진 폐차. 자동차를 고르는 일이 곧 시대를 고르는 일이었습니다. 씨앗페 출품작의 제목에 1980이라는 연도가 박혀 있는 것도 이 목록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한국 현대 판화의 지형 안에서 정명국의 자리는 이 방법론이 정합니다. 그는 판을 만들어 찍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이미 있는 물건을 판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기법이 계속 바뀌는 이유

정명국은 한 기법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본인의 정리에 따르면 실크스크린으로 찍고 안료를 뿌리는 과정에서 시작해, 동판화의 드라이포인트로, 다시 흑연 연필을 쓰는 프로타주로 옮겨 갔습니다. 프로타주를 하면서 컴퓨터 합성으로 이미지를 결합한 뒤 잉크로 칠하는 방식을 시도했고, 최근에는 실크스크린으로 기본 이미지를 찍은 다음 아크릴 물감으로 세부와 색을 올리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에코락갤러리 작가 소개).

씨앗페 출품작이 바로 그 마지막 단계의 작업입니다. 검게 찍힌 버스 위에 얇게 얹힌 분홍과 노랑이 인쇄가 아니라 손의 자국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시 이력도 그 변화와 함께 갑니다. 1998년 관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Speed Car》를 열었고, 2000년 갤러리 룩스의 《흔적》에서 프로타주를 처음 내놓았습니다. 2008년 관훈갤러리 《사고의 받아쓰기》, 2009년 문화일보갤러리 《사고의 받아쓰기 2》, 2010년 인사아트센터 《ON MASK》, 2012년 스페이스몸미술관 《결합된 시선》으로 이어졌고, 2022년 제주 비아아트갤러리 《터무니》, 2023년 금호미술관 《다 탔으면 오라잇》으로 계속됐습니다.

금호미술관 전시를 소개한 한겨레의 지역 매체 서울&은 그의 작업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프로타주 기법을 사용해 자동차를 단색의 색조로 재현하며 붓과 잉크가 만들 수 없는 금속적인 독특한 색감을 보여준다."(2023년 6월 22일)

2024년에는 제12회 울산국제목판화페스티벌에 출품 작가로 참여해 이 행사를 위해 특별 제작한 〈Old Gate〉를 선보였습니다(울산제일일보, 2024년 7월 4일).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에 따르면 2026년에는 프랑스 베르사유 미술학교 갤러리의 기획전 《Echoes of the Abyss》에 참여했고, 지금은 전업으로 작업하면서 판화 공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관의 평가도 이력에 함께 쌓였습니다. 2006~2007년 서울시립 난지창작스튜디오 1기 입주작가였고, 2008년 문예진흥기금, 200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표현활동 기금을 받았으며, 2010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진미술인 전시지원에 선정됐습니다.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읽기

〈블루 1980〉 — 2026년, silkscreen print, 40x30cm

씨앗페에 들어온 정명국의 작품은 이 한 점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도시화, 근대화에 접어들었던 1980년 그 시절 도시에서의 중요한 이동 수단 이자 생계수단이 되어주었던 시내버스에는 안내양이 있었고 만원 버스를 격어야 했다. (중략) 과거를 추억하면서 힘듬을 이겨내었던 과거를 발판으로 앞으로 나아감을 이야기해 본다." — 정명국,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앞에서 본 화면을 다시 봅니다. 열린 앞문 옆에 선 사람, 창 너머로 겹쳐 보이는 승객들. 만원 버스라는 단어가 이 작은 인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크기의 역전입니다. 실물 크기로 차를 떠내던 작가가, 같은 소재를 손바닥만 하게 줄여 텅 빈 종이 한가운데 놓았습니다. 프로타주가 대상과의 거리를 0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면, 이 화면은 거리를 한껏 벌려 놓습니다. 가까이서 만져야 보이던 것이, 멀찍이 두어야 보이는 것으로 바뀐 셈입니다. 둘레의 푸른 빛무리는 그 거리를 시간의 거리로 읽게 합니다.

세 장만 찍은 에디션이고, 그중 두 번째 장입니다. 40x30cm의 소품이라 책상 위나 좁은 벽면, 복도처럼 가까이서 보는 자리에 맞습니다. 판화를 처음 들이려는 분께 부담이 크지 않은 규모이기도 합니다.

정명국, 〈블루 1980〉, silkscreen print, 40x30cm, ₩350,000
정명국, 〈블루 1980〉, silkscreen print, 40x30cm, ₩350,000

정명국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서의 자리

정명국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는 기법이 먼저 말해 줍니다. 그는 한국 현대 판화가 '찍는 기술'에서 '떠내는 사고'로 넓어지던 시기에 프로타주를 밀고 나간 작가입니다. 성신여대 대학원 판화 전공 출신으로 성신판화 정기전에 꾸준히 참여했고, 2013년에는 성신판화상 수상 작가로 갤러리가비에서 개인전 《What's this?》를 열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소재 선택은 판화의 계보보다 사회사의 계보에 가깝습니다. 시발택시에서 포니로, 트럭에서 폐차로, 그리고 1980년의 시내버스로. 박광열이 쓴 대로 자동차는 "후기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공산품으로 자본주의의 체계와 시대적 경제논리 그리고 우리의 시대적, 문화사적인 삶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입니다. 그 아이콘의 표면을 손으로 문질러 온 20여 년이 정명국의 작업입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정명국이 씨앗페에 낸 판화는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의 온라인관에 걸려 있습니다. 오윤이 새긴 판화와 같은 자리에, 그를 오마주한 동시대 작가의 판화가 나란히 놓인 구성입니다.

전업으로 작업하며 판화 공방을 운영하는 작가가 어떤 사정들 곁에 서 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가 씨앗페에 낸 것은 만원 버스를 타고 하루를 버티던 시절의 그림입니다.

처음 이 작가를 만나는 분이라면 화면과 눈 사이의 거리를 두 번 바꿔 보시길 권합니다. 멀리서 보면 텅 빈 종이에 푸른 얼룩 하나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창 안의 사람들과 문 앞에 선 한 사람이 보입니다. 실물 크기로 차를 떠내던 작가가 이번에는 관람자를 움직이게 만든 셈입니다.

정명국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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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정명국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68년생으로 세종대학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한 작가입니다. 프로타주와 실크스크린을 주로 쓰며, 자동차를 소재로 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업으로 작업하면서 판화 공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Q. 프로타주가 무엇인가요? A. 대상 위에 종이를 밀착시키고 흑연이나 색연필로 문질러 그 표면을 떠내는 기법입니다. 정명국은 이 방식으로 떠낸 판화지 수십 장을 이어 붙여 자동차를 실물 크기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놓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한 점에 몇 주가 걸립니다.

Q. 왜 자동차를 그리나요? A. 작가는 자동차를 가면으로 봅니다. "자동차는 우리의 가면이다"라고 그는 에코락갤러리 작가 소개에 적었습니다. 다만 자동차 자체보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과 물체 그 대상에 빠져드는 사람들"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Q. 주요 개인전과 소장처는? A. 1998년 관훈갤러리 《Speed Car》를 시작으로 2008년 관훈갤러리 《사고의 받아쓰기》, 2009년 문화일보갤러리 《사고의 받아쓰기 2》, 2010년 인사아트센터 《ON MASK》, 2012년 스페이스몸미술관 《결합된 시선》, 2022년 제주 비아아트갤러리 《터무니》, 2023년 금호미술관 《다 탔으면 오라잇》 등을 열었습니다.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정명국 작품은 무엇인가요? A. 〈블루 1980〉(2026, silkscreen print, 40x30cm) 한 점입니다. 1980년 무렵 안내양이 있던 시내버스를 소재로 한 작업으로, 세 장만 찍은 에디션 중 두 번째 장입니다.

Q. 정명국 작품 가격은? A. 〈블루 1980〉은 ₩350,000입니다.

Q. 정명국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의 온라인관에 걸려 있습니다. 오윤의 판화와 함께, 그를 오마주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이 한 점씩 놓인 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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