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콘텐츠로 이동

박수지 — 오일을 쓰지 않는 유화, 그리고 그림 속에 숨는 동물들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년 9월 18일 · 씨앗페

도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유화를 배운 박수지는 정작 오일을 쓰지 않습니다. 스케치 없이 무의식을 따라 화면을 짓고, 그 안에 동물을 숨깁니다. 2020년과 2025년 작품을 나란히 놓고 그 변화를 읽습니다.

박수지 — 오일을 쓰지 않는 유화, 그리고 그림 속에 숨는 동물들

박수지, 〈KINDRED LIGHTS〉, Oil and spray on canvas, 91x116.8cm — 분홍과 연두의 색면 사이에 기린·호랑이·코끼리가 숨어 있다
박수지, 〈KINDRED LIGHTS〉, Oil and spray on canvas, 91x116.8cm — 분홍과 연두의 색면 사이에 기린·호랑이·코끼리가 숨어 있다

박수지는 일본 도쿄의 무사시노 미술대학(武蔵野美術大学) 유화학과에서 유화를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작업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유화의 전통적 기법을 거부하고 오일을 사용하지 않은 채, 물감 본연의 색을 두텁게 캔버스에 올리는 방식으로 색 자체의 존재성을 강조하였다." — 박수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유화에서 오일은 물감을 묽게 풀고, 붓질을 부드럽게 잇고, 색과 색을 섞이게 하는 매개입니다. 그것을 빼면 물감은 튜브에서 나온 그대로 뻑뻑하게 남습니다. 섞이지 않고, 번지지 않고, 각자 제 색으로 화면에 얹힙니다.

왜 굳이 그랬는가. 이유가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도쿄에서 배운 것 — 섞이지 않는 쪽

박수지는 무사시노 미술대학 유화학과를 졸업했고, 2016년에는 도쿄 롯폰기의 국립 신미술관에서 열린 5대 미술전에 참여했습니다. 2015년에는 코엔지의 BANKAN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17년에는 서울의 THE PLOT GALLERY에서 〈그림이 싱싱해〉를 열었습니다.

그의 작업 노트는 이 시기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지목합니다. 다른 문화권에서 지낸 경험이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과정과 붙어 있었고, 여러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동화되기보다 오히려 자기 색을 더 강하게 지키려는 태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곧바로 그리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 대목이 이 작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자기 색을 지킨다'가 비유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일로 색을 섞으면 색들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중간색이 됩니다. 오일을 빼면 각각의 색이 제 형태로 남습니다. 노트는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 표면적으로는 여러 색이 섞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부를 들여다보면 각각의 색이 본연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개별성과 관계성의 경계를 색으로 실험하는 셈입니다. 함께 있되 하나로 녹지 않는 방식.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그리는 절차도 통상적이지 않습니다. 노트에 따르면 그는 스케치를 하지 않고 무의식을 따라 화면을 구성합니다. 계획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무의식 속의 이야기가 드러나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화면에 무엇이 나타나는가. 노트는 화면 속 존재들이 직접 드러나는 것과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나뉜다고 적고,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쪽은 "내면에서 발견된 낯설지만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보호하려는 의지"와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유를, 순수성과 본능적 존재로서의 개체성을 지키려는 태도로 설명합니다.

그의 그림에 사람은 거의 없고 짐승만 있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동물의 모습을 빌린다는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린 이유 — 〈어흥전〉

2020년 12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아트스페이스앳에서 개인전 〈어흥전〉이 열렸습니다. 제목 그대로 호랑이들의 전시였습니다.

"그림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 고민을 오래도록 해왔던 것 같아요 어흥전은 그림이 힘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 그려낸 호랑이들의 이야기입니다" — 박수지 개인전 〈어흥전〉 소개글, 김달진미술연구소, 2020년 12월 14일

"그림은 어떤 의미여야 할까"라는 물음이 먼저 있고, 답이 호랑이였습니다. 그림이 보는 사람에게 힘과 에너지가 되게 하려면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 이 질문에 그는 가장 직설적인 것을 골랐습니다.

이 전시 이후 그의 작업은 〈refresh〉 연작으로 이어집니다. 설미재미술관을 비롯한 전국의 미술관·갤러리에서 초대전이 이어졌고, 2023년부터는 설미재미술관의 소속작가로 레지던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단체전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도 참여했습니다.

5년 사이에 일어난 일

작업 노트에는 그 뒤의 변화가 담담하게 적혀 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개인적 상실을 겪었고, 설미재미술관에서의 작업은 색과 형상의 관계를 더 해체하는 방향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비교적 또렷하게 드러나던 존재들이 강렬한 색과 거친 붓질 속에 더 깊이 숨겨지면서, 보는 사람이 화면을 적극적으로 뒤져야 이야기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25년, 양평으로 옮기면서 작업은 다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고 적혀 있습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네 점이 마침 2020년 두 점, 2025년 두 점입니다. 노트가 말한 변화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합입니다.

씨앗페 출품작 네 점 읽기

〈LION KING〉 — 2020년, Oil and acrylic on canvas, 80.3x100cm

〈어흥전〉과 같은 해의 작품입니다.

바탕의 상당 부분이 흰색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위로 주황빛 노랑이 굵게 흘러내리고, 왼쪽 아래에는 짙은 올리브색과 보라색 덩어리가 나이프로 밀어 붙인 듯 쌓여 있습니다. 오른쪽 위로는 자홍색 띠가 비스듬히 가로지릅니다.

동물들은 그 색 사이에 또렷하게 서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서 파랑·보라의 큰 짐승 하나가 작은 주황색 새끼 사자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있고, 화면 가운데 왼쪽에는 분홍빛 암사자의 얼굴이 정면을 봅니다. 중앙에는 작은 짐승이 다른 짐승의 등에 올라타 있고, 오른쪽 아래에는 부리가 큰 새 한 마리가 서 있습니다.

흰 여백이 넉넉해서 동물 하나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노트가 "이전에는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났던 존재들"이라고 쓴 시기가 바로 이 화면입니다. 네 점 중 두 번째로 큰 작품입니다.

박수지, 〈LION KING〉, Oil and acrylic on canvas, 80.3x100cm, ₩4,000,000
박수지, 〈LION KING〉, Oil and acrylic on canvas, 80.3x100cm, ₩4,000,000

〈TOGETHER〉 — 2020년, Oil on canvas, 53.0x53.0cm

한 변 53cm의 정사각형으로, 네 점 중 가장 작습니다. 제목이 'TOGETHER'라는 점이 앞서 읽은 노트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 각각의 색이 제 형태로 남으면서도 조화를 이룬다는 그 대목 말입니다. 함께 있음을 그리되 섞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린다는 것이 이 작가의 문법이고, 제목이 그것을 그대로 가리킵니다.

작은 화면이라 서재나 침실처럼 가까이서 보는 자리에 어울립니다.

박수지, 〈TOGETHER〉, Oil on canvas, 53.0x53.0cm, ₩1,500,000
박수지, 〈TOGETHER〉, Oil on canvas, 53.0x53.0cm, ₩1,500,000

〈KINDRED LIGHTS〉 — 2025년, Oil and spray on canvas, 91x116.8cm

5년 뒤입니다. 그리고 매체에 'spray'가 들어옵니다.

〈LION KING〉에서 넓게 남아 있던 흰 바탕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분홍·연두·노랑·군청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나이프로 밀어 붙인 두꺼운 색면들이 서로 겹쳐 각을 이룹니다. 오른쪽 아래에는 스프레이로 그은 노란 곡선이 리본처럼 지나갑니다.

동물들은 그 색면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왼쪽 위에 기린 두 마리가 서로 목을 마주 대고 서 있고, 오른쪽에는 분홍 줄무늬 호랑이 한 마리가 몸을 길게 세워 위로 뻗습니다. 가운데에는 연둣빛이 스민 코끼리가 정면으로 서 있고, 왼쪽 아래에는 표범 한 마리가 걸어 나옵니다. 그 사이사이에 훨씬 작은 짐승들의 자취가 흐릿하게 섞여 있습니다.

같은 짐승들인데 〈LION KING〉에서와 달리 색과 거의 같은 무게로 놓여 있습니다. 한눈에 세어지지 않고, 한참 들여다봐야 몇 마리인지 알게 됩니다. 노트가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화면을 탐색해야만 서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쓴 그 상태가 이것입니다.

네 점 중 가장 큰 화면이라 거실이나 접견 공간의 정면 벽을 감당합니다.

박수지, 〈KINDRED LIGHTS〉, Oil and spray on canvas, 91x116.8cm, ₩5,000,000
박수지, 〈KINDRED LIGHTS〉, Oil and spray on canvas, 91x116.8cm, ₩5,000,000

〈TROPICAL FOREST〉 — 2025년, Oil and spray on canvas, 53x65.1cm — 판매 완료

〈KINDRED LIGHTS〉와 같은 해, 같은 매체 조합의 작품입니다. 씨앗페에서는 이미 새 소장처를 찾았습니다.

박수지, 〈TROPICAL FOREST〉, Oil and spray on canvas, 53x65.1cm, 판매 완료
박수지, 〈TROPICAL FOREST〉, Oil and spray on canvas, 53x65.1cm, 판매 완료

네 점을 함께 보려면 박수지 작가 페이지로 가시면 됩니다.

이 그림들을 보는 법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가까이서 한 번, 멀리서 한 번 보십시오. 오일을 쓰지 않고 올린 물감이라 표면에 두께가 그대로 남습니다. 가까이 서면 나이프와 붓이 지나간 자국이 각각 다른 색으로 보이고, 멀리 서면 그것들이 하나의 색면으로 합쳐집니다. 섞이지 않은 색들이 거리에 따라 섞여 보이는 구조입니다.

둘째, 짐승을 세어 보십시오. 특히 2025년 작품에서는 처음에 두세 마리로 보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늘어납니다. 작가가 스케치 없이 화면을 짓고 존재들을 색 속에 숨긴 결과이고, 찾는 일 자체가 감상의 일부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작품을 처음 들이는 과정 전반이 궁금하시다면 처음 그림을 사는 사람을 위한 가이드를 함께 보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박수지가 씨앗페에 네 점을 낸 것은 그가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그림이 힘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 호랑이를 그렸다고 말한 작가입니다. 그 힘이 화면 안에만 머물지 않게 하는 방법 하나가, 작품을 이런 자리에 내놓는 일일 것입니다.

박수지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 보기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함께 읽으면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박수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일본 도쿄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유화학과에서 유화를 전공한 화가입니다. 일상의 호흡과 풍경을 다시 부르는 〈refresh〉 연작으로 설미재미술관을 비롯한 전국의 미술관·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이어왔고, 2023년부터 설미재미술관 소속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유화인데 오일을 안 쓴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A.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유화의 전통적 기법을 거부하고 오일을 사용하지 않은 채, 물감 본연의 색을 두텁게 캔버스에 올리는 방식으로 색 자체의 존재성을 강조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오일로 물감을 풀지 않기 때문에 색이 서로 섞이지 않고 각자의 형태로 화면에 남습니다.

Q. 왜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나오나요? A. 작가의 작업 노트는 화면 속 존재가 동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순수성과 본능적 존재로서의 개체성을 유지하려는 태도"로 설명합니다.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내면에서 발견한 낯설지만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보호하려는 의지와 연결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Q. 〈어흥전〉은 어떤 전시였나요? A. 2020년 12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트스페이스앳에서 연 개인전입니다. 작가는 "어흥전은 그림이 힘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 그려낸 호랑이들의 이야기"(김달진미술연구소, 2020년 12월 14일)라고 밝혔습니다.

Q. 주요 전시 이력은? A. 개인전으로 〈어흥전〉(아트스페이스앳, 2020), 〈그림이 싱싱해〉(THE PLOT GALLERY, 2017), 코엔지 BANKAN 개인전(일본, 2015)이 있습니다. 2016년 도쿄 롯폰기 국립 신미술관 5대 미술전, 2023년 단체전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참여했으며, 〈refresh〉 연작으로 설미재미술관 등에서 초대전을 이어왔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박수지 작품은 몇 점이고 가격은? A. 네 점입니다. 〈KINDRED LIGHTS〉(2025, Oil and spray on canvas, 91x116.8cm, ₩5,000,000), 〈LION KING〉(2020, Oil and acrylic on canvas, 80.3x100cm, ₩4,000,000), 〈TOGETHER〉(2020, Oil on canvas, 53.0x53.0cm, ₩1,500,000), 그리고 〈TROPICAL FOREST〉(2025, Oil and spray on canvas, 53x65.1cm)는 판매 완료되었습니다.

Q. 2020년 작품과 2025년 작품은 어떻게 다른가요? A. 2020년 작품은 흰 바탕이 넓게 남아 동물의 형태가 또렷하게 읽힙니다. 2025년 작품은 화면 전체가 색으로 채워지고 스프레이가 더해지면서 동물들이 색면 사이로 깊이 들어갑니다.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이 변화를 "강렬한 색과 거친 붓질 속에 더욱 깊이 숨겨지며,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화면을 탐색해야만 서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합니다.

Q. 박수지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박수지는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관련 매거진

씨앗페

·

공유하기

새 작품과 이야기, 메일로 받아보세요

새 작품 소식, 작가 이야기, 상호부조 기금 소식을 보내드립니다.

구독하기를 누르면 이메일 수집·발송(뉴스레터 목적)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돼요. 개인정보처리방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