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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원 — 한 작품에 100시간, 아이패드로 그려 판에 새기는 사람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년 9월 18일 · 씨앗페

작업의 중심에 '발화(發火)'를 둔 판화가 성희원. 디지털 드로잉을 설계도로 삼아 판화와 유화를 오가며 이미지를 몇 번이고 다시 통과시킵니다. 작가 본인의 글과 씨앗페 출품작 〈殘存〉의 화면으로 그 방법을 읽습니다.

성희원 — 한 작품에 100시간, 아이패드로 그려 판에 새기는 사람

성희원, 〈殘存〉, mixed media on printmaking paper, 19.7x42cm — 거친 점묘 바탕 위에 여러 인물의 형상이 겹쳐 하나의 얼굴처럼 떠오르는 흑백 화면
성희원, 〈殘存〉, mixed media on printmaking paper, 19.7x42cm — 거친 점묘 바탕 위에 여러 인물의 형상이 겹쳐 하나의 얼굴처럼 떠오르는 흑백 화면

디지털 도구를 쓰는 작가에게 보통 기대하는 것은 속도입니다. 성희원은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나에게 디지털 기술은 작업 시간을 줄이기 위한 자동화 도구가 아니라, 이미지에 더 오래 머물고 더 깊이 개입하기 위한 도구다." —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작가 노트

이 한 문장이 성희원의 작업을 가장 짧게 요약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숫자가 그 말이 수사가 아님을 알려줍니다 — 한 작품에 100시간 이상.

발화(發火) — 불이 붙는 순간이 아니라 떠오르는 순간

작가는 자기 작업의 중심에 '발화'라는 말을 둡니다. 다만 그 뜻을 통상적인 쪽으로 읽지 말라고 먼저 못을 박습니다.

"작업의 중심에 있는 '발화'는 단순히 불이 붙는 현상이나 말을 시작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래 침묵해 있던 기억과 이미지가 현재의 표면 위로 올라오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전환의 순간을 뜻한다." —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작가 노트

그 '전환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 작가가 고른 재료는 두 가지입니다. 유적지와 건축물, 그리고 해골.

"나는 유적지와 건축물을 문명의 흔적이자 소멸의 증거로 바라보고, 해골을 죽음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바라본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비롯된 이 이미지들을 하나의 장면 안에 결합함으로써, 죽음과 삶, 과거와 현재, 붕괴와 생성이 겹쳐 있는 풍경을 만든다."

주목할 것은 두 재료가 같은 성질을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폐허도 해골도 '남은 것'입니다. 무너진 뒤에 남은 구조, 살이 사라진 뒤에 남은 뼈. 작가가 이것을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읽습니다 — "폐허는 완전히 끝난 장소가 아니라 다시 무언가가 시작될 수 있는 공간이며, 소멸은 새로운 생성의 불씨가 된다."

불씨. 여기서 '발화'라는 말이 다시 걸립니다.

작업의 문법 — 설계도, 그리고 네 번의 통과

성희원은 자기 공정을 순서대로 적어 두었습니다. 드문 일이라 그대로 따라가 볼 만합니다.

첫째, 수집과 합성. 사진과 시각 자료를 모아 컴퓨터로 편집·합성해 하나의 공간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이 합성 이미지는 결과물이 아닙니다. 작가의 표현으로는 "직접 그리기 위한 설계도에 가깝"습니다.

둘째, 디지털 드로잉. 그 설계도를 놓고 아이패드에서 형태와 선, 질감, 명암을 처음부터 다시 그립니다. "반복적으로 지우고 덧그리는 과정"에 100시간 이상이 들어가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합성으로 5분이면 만들 수 있는 화면을, 손으로 다시 짓는 것입니다.

셋째, 판. 디지털로 구성한 이미지를 판화의 물질 과정으로 옮깁니다.

"판을 긁고 새기며, 잉크를 밀어 넣고, 압력과 번짐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흔적이 발생한다. 이러한 판의 상처와 잉크의 번짐은 훼손되고 변형된 기억의 표면과 닮아 있다."

넷째, 유화와 리터치. 물감의 두께와 붓질, 색의 축적으로 물질성과 시간을 더하고, 마지막에 다시 손으로 만집니다.

이 순서에서 중요한 것은 각 단계가 앞 단계를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판은 긁히고 잉크는 번지고, 그 어긋남이 작업의 목적입니다. 통제된 디지털 이미지를 통제되지 않는 물질에 밀어 넣어 "예측할 수 없는 흔적"을 얻는 것. 작가가 이 공정을 "반복과 변환"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작가는 이 방식을 스스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가장 느리고 수고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이미지에 오래 머물며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다시 불러내는 것. 그것이 내가 지금 이어가고 있는 회화의 방식이다."

밖에서 확인되는 한 지점

성희원에 관한 외부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한 건입니다 — 2026년 제42회 무등미술대전 판화 부문 우수상. 광주일보와 무등뉴스 등이 2026년 4월 같은 수상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출품작 제목이 **〈발화〉**였습니다.

이 대전에는 전국에서 1,892점이 출품됐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1점, 대상 7점, 우수상 28점이 나왔습니다(전체 수상작 수는 보도한 매체마다 달라 적지 않습니다). 양화·판화·조각 부문은 대상을 선정하지 않았습니다. 성희원은 박혜영과 함께 판화 부문 우수상 두 자리 가운데 하나를 받았습니다.

작가 노트가 중심 개념으로 설명한 그 말이, 실제 출품작의 제목이자 수상 기록에 남은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이 작가를 읽는 데 작은 확인이 됩니다. 개념과 작품이 따로 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작가가 제출한 이력에 따르면 성신여자대학교 서양화과·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판화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2025년 아시아프(ASYAAF) 2부와 2026년 국제 판화 비엔날레·대학 비엔날레 등에 참여했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읽기

〈殘存〉 — 2026년, mixed media on printmaking paper, 19.7x42cm

제목은 '잔존(殘存)', 남아 있음입니다. 앞에서 읽은 폐허와 뼈의 자리에 정확히 놓이는 제목입니다.

화면은 흑백입니다. 배경 전체가 거친 입자로 뒤덮여 있고, 그 한가운데 세로로 긴 덩어리가 서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얼굴 윤곽처럼 보입니다. 가까이 보면 그 안이 사람의 형상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팔을 들어 올린 몸, 웅크린 몸, 겹쳐 서서 서로의 경계가 녹아버린 몸들. 어느 것이 누구의 팔인지 구분되지 않는 지점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아래쪽에서는 형상이 세로선으로 흘러내리며 풀어집니다.

작가가 이 작품에 붙인 설명이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가리킵니다.

"내 작업에서는 여러 인물의 형상을 중첩해 하나의 얼굴처럼 보이도록 구성했다. 디지털 프린트 위에 석판과 드라이포인트를 더해 이미지의 층과 마찰감, 거친 선의 흔적을 강조했다. (…) 이를 통해 집단 속에서 개인의 형상이 생성되고 해체되는 모습을 표현했다." —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작품 설명

매체 표기가 "mixed media"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디지털 프린트가 바닥에 깔리고 그 위에 석판(리소그래피)과 드라이포인트가 올라간 것입니다. 화면의 고운 입자는 석판의 결이고, 형상의 가장자리를 긁어내는 날카로운 선은 드라이포인트의 자국으로 읽힙니다. 앞 장에서 읽은 "판의 상처"가 바로 이것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오윤의 목판화가 가진 "거칠고 직선적인 선의 힘, 군중이 만들어내는 집단적 에너지와 생명력"을 오마주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목판이 아닌 다른 판화 기법으로 그 힘을 이어보려 했다는 것입니다.

성희원, 〈殘存〉, mixed media on printmaking paper, 19.7x42cm, ₩200,000
성희원, 〈殘存〉, mixed media on printmaking paper, 19.7x42cm, ₩200,000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성희원은 석사 과정에 있는 젊은 작가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집단 속에서 개인의 형상이 생성되고 해체되는 모습"을 그린 한 점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이 작가가 어느 쪽을 보고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성희원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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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성희원 작가는 어떤 작업을 하나요? A. '발화(發火)'를 중심 개념으로 유적지·건축물·해골의 이미지를 결합해 죽음과 삶, 소멸과 생성을 다룹니다. 사진과 디지털 합성으로 시작한 이미지를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다시 그린 뒤 판화와 유화의 물질 과정으로 옮기며, 긁힘·번짐·붓질·리터치가 중첩된 화면을 만듭니다.

Q. '발화'가 무슨 뜻인가요? A. 작가 본인이 통상적 의미를 먼저 부정합니다. "단순히 불이 붙는 현상이나 말을 시작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래 침묵해 있던 기억과 이미지가 현재의 표면 위로 올라오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전환의 순간"을 뜻한다고 작업 노트에 썼습니다.

Q. 한 작품에 얼마나 걸리나요? A. 작가는 작업 노트에서 "한 작품에 100시간 이상을 들여 반복적으로 지우고 덧그리는 과정을 거친다"고 밝혔습니다. 디지털 도구를 속도가 아니라 "이미지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쓴다는 것이 본인의 설명입니다.

Q. 수상 이력이 있나요? A. 2026년 제42회 무등미술대전 판화 부문에서 작품 〈발화〉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광주일보·무등뉴스 등 보도). 이 대전에는 전국에서 1,892점이 출품됐고, 판화 부문은 대상을 선정하지 않아 우수상 두 자리가 최상위였습니다. 작가가 제출한 이력에는 안견미술대전 특선(2026)·입선(2025)도 있습니다.

Q. 〈殘存〉은 어떤 기법으로 만들어졌나요? A. 작가 설명에 따르면 디지털 프린트 위에 석판(리소그래피)과 드라이포인트를 더한 혼합 기법입니다. 그래서 매체 표기가 "mixed media on printmaking paper"입니다.

Q. 〈殘存〉 가격은? A. ₩200,000입니다. 19.7x42cm, 2026년작입니다.

Q.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성희원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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