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판화로 출발해 코튼 펄프를 찢어 붙이는 페이퍼 캐스팅으로 나아간 판화가 박광열. 을지로에서 사라진 활판 인쇄 형지로 만든 〈못다한 이야기 - 눈물〉 한 점을 통해 그의 40년 판화 인생을 읽습니다.
박광열 — 종이에 찍힌 활자, 그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

흰 종이 한 장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표면 전체에 깨알 같은 글자 자국이 빼곡합니다. 두 단으로 나뉜 지면, 세로로 조판된 활자, 신문이나 사전의 한 면을 그대로 떠낸 듯한 격자무늬. 그리고 그 위로 길고 짧은 물방울 모양의 홈이 세로로 파여 있습니다. 짧은 것은 손가락 한 마디, 긴 것은 화면 중앙을 가로질러 위에서 아래까지 이어집니다. 색은 없습니다. 종이도 희고 글자도 희고 눈물도 흽니다. 오직 빛이 홈의 그림자를 만들어야 형태가 드러납니다.
판화가 박광열의 〈못다한 이야기 - 눈물〉입니다. 동판화로 출발한 이 작가가 잉크도 물감도 없이, 종이 자체를 조각하듯 다뤄 만든 작품입니다.
세종대에서 다마미술대학까지
박광열은 1955년생입니다. 경기문화재단 작가 아카이브가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1976년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 서양화전공을 졸업하고, 1984년 세종대학교 회화과 서양화 전공을 마쳤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88년 다마미술대학 대학원 미술연구과 동판화 전공을 졸업합니다. 서양화로 시작해 판화, 그중에서도 동판화로 전공을 좁혀간 경로입니다.
이력은 여러 도시로 뻗어 있습니다. 1984년 이래 서울, 부산, 인천, 도쿄, 삿포로, 나가노 등지에서 22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230여 차례의 국제전과 기획전에 참여했습니다. 1995년 도쿄 갤러리 Q, 2013년 나가노 EN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는 기록이 경기문화재단 아카이브에 남아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1999년 예맥화랑 개인전(아르코예술기록원 기록), 1989년 광주시립미술관 출품(광주시립미술관 기록)이 확인됩니다. 1991년에는 소나무갤러리에서 열린 《융합·21세기전》에 강성원·김성배·정복수 등 여러 작가와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메모리가 소장한 도록 기록입니다.
2005년작 〈공간의 기억-묻혀진 이야기〉는 양평군립미술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종이와 틀에 의한 부조 기법으로 만든 106x70x3cm 작품으로, 제목에 이미 '공간의 기억'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20년 뒤 씨앗페에 나온 〈못다한 이야기 - 눈물〉과 겹치는 어휘입니다. 특정한 공간에서 나온 사물을 틀로 삼아 종이를 떠내는 방식이, 적어도 2005년부터 이 작가의 반복되는 작업 문법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동철 문하의 판화가들
박광열의 이름은 서울대학교 회화과 교수였던 판화가 하동철의 제자군에서도 발견됩니다. 2016년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하동철 교수 별세 후 열린 추모전은 그의 제자들이 직접 준비를 맡았습니다.
"'부대낀' 제자들이 직접 맡았다. 하동철 뒤를 이어 서울대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윤동천을 필두로 김태진(국민대 교수), 박광열(작가), 신수진(서울대 강사), 최성원(서울여대 교수) 등이 함께 했다." — 한국일보, 2016년 11월 10일
같은 계보는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됩니다. 삼성문화재단이 판화 인구 저변 확대를 위해 299부 한정판으로 제작한 판화집 《THE COLLECTION OF KOREAN CONTEMPORARY ENGRAVINGS 한국현대작가選》에는 하동철·이기봉·이영애·임영재·윤동천과 나란히 박광열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서울대 회화과 교수 자리를 이어받은 윤동천, 국민대 교수 김태진과 함께 판화라는 한 장르를 붙들고 있던 동시대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서로 다른 두 출처에서 교차 확인되는 셈입니다.
잉크 대신 종이 자체를 다루다
동판화를 전공한 판화가가 판화의 가장 근본적인 재료인 잉크를 내려놓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판화 전문 온라인 갤러리 artnedition은 박광열의 작업 방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박광열 작가는 세종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후 일본 다마미술대학교 대학원에서 동판화를 전공하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판화가이다. 판화의 본질에 충실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그는 잉크나 물감 대신 코튼 펄프를 물에 불려 찢어 사용하는 등 실험적인 재료와 기법을 통해 판화의 확장된 표현을 시도한다." — artnedition.com 작가 프로필
찍어내는 행위는 판화의 기본기입니다. 그런데 박광열은 찍어낼 잉크 대신 종이 그 자체를 찍어내는 재료로 씁니다. 코튼 펄프를 물에 불려 찢은 뒤 틀 위에 얹으면, 마르면서 틀의 요철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판화가 상정하는 '판'과 '찍힌 상'의 관계는 그대로 두되, 잉크라는 매개를 걷어낸 방식입니다. 씨앗페 출품작의 재료명이 회화나 판화가 아니라 'hand made paper casting'(수제 종이 캐스팅)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못다한 이야기 - 눈물〉 — 사라진 활판의 형지 위에서
씨앗페에 들어온 박광열의 작품은 한 점, 〈못다한 이야기 - 눈물〉입니다. 크기는 51x41x2.5cm, 재료는 hand made paper casting, 가격은 ₩2,000,000입니다. 두께 2.5cm가 이 작품이 평면 회화가 아니라 부조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작가는 이 작업에 쓰인 '틀'이 무엇인지 직접 밝혀 두었습니다.
"특정한 장소, 경험, 시기 등에서 파생되는 사물로 형(판)을 만든다. 그와 결부된 소재를 고해하여 기억과 경험의 소재로서의 수제종이를 만들어 또 하나의 형(화)를 떠낸다. 이렇게 변이된 형은 각 개인의 경험과 기억, 사회적 현실을 또 다른 형태로 상기 시킨다. (참고-이번 작업에서는 오늘날에 완전히 사라진 1980년대 을지로 인쇄 골목에서 수집한 활판 인쇄용 형지-오윤작가가 생존했던 시기-로 부터 시작하였다. 인쇄용 형지에는 문학, 인문, 사회, 경제, 시사, 광고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내용이 활자 자국으로 남아 있다. 이를 응용, 활용 한 작품인데 추상적이나마 당시 사회의 일편과 오윤을 기리는 마음을 담을 수 있었다.)" — 작품 설명
틀 자체가 유물입니다. 1980년대 을지로 인쇄 골목에서 활판 인쇄에 쓰였던 형지, 지금은 을지로에서도 완전히 사라진 물건입니다. 문학과 인문, 사회와 시사, 광고까지 그 시대의 온갖 글이 활자로 찍혀 있던 판을 수집해, 그 요철을 종이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두 단짜리 깨알 글자 격자가 바로 그 활판의 흔적입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이제 읽어낼 수 없습니다. 글자는 남았지만 문장은 지워졌습니다.
그 위로 파인 눈물 모양의 홈은 작가가 새로 더한 형태입니다. 짧은 것과 긴 것이 뒤섞여 화면 곳곳에 흩어져 있고, 가장 긴 하나는 화면 중심을 세로로 가로지릅니다. 활판이 새긴 익명의 활자 위로, 작가가 눈물을 얹었습니다. 작품 하단 여백에는 "AP. '못다한 이야기 - 눈물' K-y Park."이라는 연필 서명이 남아 있습니다. 에디션 표기 AP(Artist's Proof)와 작가의 육필 서명이 종이 재질 그대로 드러나는, 인쇄가 아니라 캐스팅이기에 가능한 마감입니다.
작가노트는 이 틀이 "오윤작가가 생존했던 시기"의 물건이라는 점, 그리고 그로부터 "오윤을 기리는 마음을 담을 수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적어두었습니다. 오윤이 살아 활동하던 시대의 을지로 인쇄 골목, 그 시대가 남긴 형지가 이 작품의 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판매되는 판화가
박광열의 작업은 회고전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판화 전문 온라인 갤러리 artnedition에는 〈나의 어머니〉 연작 두 점이 현재도 판매 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판화 전문 상업 갤러리 jpleart에서도 〈Bird of Dream〉〈Dream in Green〉 같은 한정판 에칭 작품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동판화 전공자로 출발한 이력이 지금도 시장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고, 그 옆에서 그는 이번 작품처럼 잉크를 쓰지 않는 실험을 계속해 온 셈입니다.
판화의 확장, 그리고 지금
박광열의 이력을 따라가면 판화라는 매체를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지를 40년 동안 실험해 온 사람이 보입니다. 동판화로 시작해 잉크를 걷어내고, 종이 자체를 조형 재료로 삼고, 이번에는 사라진 활판 인쇄물의 형지를 틀로 가져왔습니다. 매체는 계속 바뀌었지만 방식은 일관됩니다. 이미 존재하는 사물의 요철을 받아, 그 위에 새로운 상을 얹는 일입니다.
〈못다한 이야기 - 눈물〉은 씨앗페 상설 온라인 갤러리에 걸려 있고, 활판이 새긴 시대가 오윤이 살던 시기와 겹친다는 이유로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온라인관에도 함께 걸려 있습니다. 박광열은 동료 예술인과 연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씨앗페에 내놓았고, 그 마음이 활판의 형지를 고르는 순간부터 오윤을 향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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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박광열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55년생 판화가입니다. 1976년 서울예술고등학교 서양화전공, 1984년 세종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8년 일본 다마미술대학 대학원에서 동판화를 전공했습니다. 1984년 이래 서울·부산·인천·도쿄·삿포로·나가노 등지에서 22회의 개인전을, 230여 차례의 국제전·기획전을 가졌습니다.
Q. 어떤 기법을 쓰나요? A. 동판화 전공자이지만 근작에서는 잉크나 물감 대신 코튼 펄프를 물에 불려 찢어 쓰는 hand made paper casting(수제 종이 캐스팅) 기법을 씁니다. 특정 사물을 틀 삼아 그 요철을 종이에 그대로 떠내는 방식입니다.
Q. 하동철 교수와는 어떤 관계인가요? A. 서울대학교 회화과 교수였던 판화가 하동철의 제자군에 속합니다. 2016년 하동철 교수 추모전은 윤동천(서울대 교수)·김태진(국민대 교수)·박광열·신수진·최성원 등 제자들이 직접 준비했다고 한국일보가 보도했습니다. 삼성문화재단이 299부 한정판으로 제작한 판화집에도 하동철·윤동천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Q. 씨앗페 출품작은 무엇인가요? A. 〈못다한 이야기 - 눈물〉 한 점입니다. hand made paper casting, 51x41x2.5cm, ₩2,000,000. 1980년대 을지로 인쇄 골목에서 수집한 활판 인쇄용 형지를 틀로 삼아 종이를 떠내고, 그 위에 눈물 모양의 홈을 새긴 작품입니다.
Q. 이 작품이 오윤과 관련이 있나요? A. 작가노트에 따르면 틀로 쓰인 활판 형지는 "오윤작가가 생존했던 시기"의 것으로, 작가는 이를 통해 "당시 사회의 일편과 오윤을 기리는 마음을 담을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작품은 씨앗페 상설 온라인 갤러리와 함께 오윤 40주기 특별 판화전 온라인관에도 걸려 있습니다.
Q. 박광열 작품은 어디에 소장돼 있나요? A. 2005년작 〈공간의 기억-묻혀진 이야기〉가 양평군립미술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이 밖에 1989년 광주시립미술관, 1999년 예맥화랑, 2013년 나가노 EN 갤러리, 1995년 도쿄 갤러리 Q 등에서 전시 이력이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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