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판에 선을 새겨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서로 닿아 있는 장면을 찍어온 판화가 권혜정. 〈Never Ending Story〉에서 〈Monologue〉까지, 한 작가가 20년 넘게 이어온 독백의 형식을 읽습니다.
권혜정 — 독백을 새기는 판화가, 선 하나로 관계를 그리다

액자 안에 작은 화면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종이에 눌린 판 자국이 둥근 모서리를 남겼고, 그 위에 검은 선 몇 가닥이 짐승 한 마리를 그려 놓았습니다. 몸통은 네모에 가깝고, 꼬리는 위로 말려 올라갔습니다. 그 짐승의 앞발이 놓인 자리에서 계단이 시작됩니다. 두껍고 검은 선으로 새긴 계단이 오른쪽 아래로 세 칸, 네 칸 내려갑니다.
아래쪽 여백에는 연필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왼쪽에 '1/15', 가운데에 'Monologue', 오른쪽에 작가의 서명과 '2015'.
씨앗페에 들어온 권혜정의 작품입니다. 〈Monologue〉, 2015년, 동판, 20x17x0.2cm.
독백극이라는 형식
'Monologue'는 이 작가가 오래 써 온 말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소장품 설명에서 "권혜정은 자신의 작품을 종종 '모놀로그(monologue)'라고 표현하는데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마치 독백극처럼 작품에 직접적으로 투영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작가 본인의 설명은 더 구체적입니다. 2016년 서울 성수동 판화공방 프린트아트리서치센터(PARC)에서 열린 초대전을 앞두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작품들은 많은 작가들이 그러하듯 내재되어 있는 감정들을 표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 마치 독백극처럼 내재되어 있는 생각들을 소리 내어 풀어 냄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효과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독백극의 대사들인 셈입니다." — 인사이드코리아, 2016년 5월 8일
그리고 독백이 왜 혼잣말이 아닌지를 덧붙입니다.
"독백극은 혼자서 말을 한다는 점 때문에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묻는 자와 답하는 자가 모두 존재합니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의 깊이를 더 깊게, 그리고 더 섬세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 같은 기사
묻는 자와 답하는 자가 한 사람 안에 함께 있다는 것. 이 문장이 그의 화면 구성과 정확히 겹칩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형상들은 늘 둘 이상이고, 서로 닿아 있습니다.
서로 윤곽선이 맞닿아 있다는 것
서울시립미술관은 권혜정의 동판화 〈Never Ending Story (1)〉(2004, 동판화, 60×90cm)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의 작품 설명은 이 그림의 구조를 이렇게 풀어냅니다.
"곳곳에 보이는 인간, 동물, 식물들의 형상은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그 윤곽선이 서로 맞닿아 있거나 겹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권혜정은 〈Never Ending Story〉 시리즈를 사람과 사람, 혹은 사물과 사람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여 제작했다고 설명한다." —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 설명
형상을 겹쳐 놓는 것이 곧 관계를 그리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한국현대판화가협회 회원 데이터베이스에도 같은 작품이 'Never ending story, Etching, 60×90cm, 2004'로 올라 있습니다.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 글도 같은 자리를 가리킵니다.
"사람, 동물, 식물이 함께 머무는 장면을 만듭니다. 선을 새기고, 겹쳐 찍고, 남겨진 흔적을 따라 서로 다른 존재 사이의 관계를 기록합니다." —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
미술관이 2004년 작품에서 읽어낸 것과 작가가 지금 자기 작업을 설명하는 말이 같습니다. 20년을 건너뛰어도 문장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연작의 이름들도 그 자리를 맴돕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주요 시리즈로 여러 동물이 등장하는 〈Conversation〉, 화면을 형상으로 가득 채운 〈Never Ending Story〉, 내면을 드로잉하듯 푼 〈Monologue〉, 인물과 비정형의 형태가 함께 나오는 〈Relationship〉을 꼽습니다. 대화, 끝나지 않는 이야기, 독백, 관계. 네 단어 모두 둘 이상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강원대에서 성신여대로, 그리고 국제 공모전으로
권혜정은 1973년에 태어났습니다. 1997년 강원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2003년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인사이드코리아가 같은 학력을 기록합니다.
개인전은 2002년 갤러리 보다(서울)에서 시작했습니다. 이후 2006년 갤러리NV(서울), 2008년 하나아트갤러리(서울)와 호시갤러리(도쿄), 2016년 프린트아트리서치센터(서울), 2017년 B-갤러리(도쿄)로 이어집니다. 서울과 도쿄를 오가는 목록입니다.
국제 공모전은 이 작가의 이력에서 가장 두터운 부분입니다. 2016년 일본에서 열린 제1회 TKO 국제소형판화전에서 금상을, 같은 해 제17회 대만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대만국립미술관의 상을 받았습니다. 이 두 건은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이력, 인사이드코리아 보도, 서울시립미술관 작가 소개에 모두 나옵니다.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이력에 따르면 그 뒤로도 국제 공모 수상이 이어집니다. 2023년 미국 필라델피아 The Print Center의 제97회 국제공모에서 Renaissance Graphic Arts Award, 2024년 리투아니아 빌뉴스 국제소형판화 트리엔날레에서 Diploma Prize, 2025년 일본 도쿠시마 아와가미 국제 미니어처 판화전에서 Cranfield Ink Prize. 같은 이력서는 국내외 개인전 15회를 기록하며, 서울과 인도네시아·인도·대만·일본 도쿄·미국 앨버커키·가평·춘천을 열린 장소로 적고 있습니다.
※ 원주전통판화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동명의 작가 '권혜정'은 다른 사람입니다. 이 글이 다루는 작가와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씨앗페 출품작 읽기
〈Monologue〉 — 2015년, 동판, 20x17x0.2cm
앞에서 읽은 '독백극'이라는 형식이 제목 그대로 붙은 작품입니다. 화면에는 짐승 한 마리와 계단이 있습니다. 짐승은 계단이 시작되는 자리, 그러니까 맨 윗칸에 서 있습니다. 내려갈 수도 있고 그대로 있을 수도 있는 자리입니다.
작가가 이 작품에 붙인 작업 노트는 그 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눈을 감고 계단 끝에 서서 망설이는 형상은 현대 사회의 과잉된 정보와 속도 속에서 고립된 개인의 불안을 대변합니다. 단순하지만 날카로운 동판화의 선과 잉크의 농담, 판의 여백은 지금 우리가 외면하기 쉬운 내면의 침묵과 현대적 고독을 가시화합니다." —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판의 여백'이라는 말이 실물에서 바로 확인됩니다. 검은 선은 아주 적고, 종이에 남은 눌린 자국이 그 선보다 훨씬 넓습니다. 판화에서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판이 종이를 누른 흔적이 남은 곳입니다.
에디션은 15점이고, 씨앗페에 들어온 것은 그중 첫 번째입니다. 연필로 적힌 '1/15'가 그 표시입니다.

- 20x17x0.2cm · 동판 · 2015 · ₩1,200,000
- 작품 페이지 →
작은 화면이라 서재나 복도처럼 가까이 다가가 보는 자리에 어울립니다. 판화를 처음 들이는 분께 권할 만한 크기이기도 합니다. 한국 현대 판화의 지형을 함께 읽으면 이 작품이 놓인 자리가 더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권혜정이 씨앗페에 판화를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윤곽선을 맞대고 있는 장면을 20년 넘게 새겨 온 작가가 동료 곁에 자기 판 하나를 놓는 일은, 그가 화면 안에서 해 온 일과 같은 모양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함께 읽으면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권혜정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73년생 판화가입니다. 1997년 강원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2003년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습니다. 동판에 선을 새겨 찍는 에칭·애쿼틴트·드라이포인트 기법으로 사람과 동물, 식물이 서로 맞닿아 있는 장면을 그려 왔습니다.
Q. 'Monologue'는 무슨 뜻인가요? A. 작가가 자기 작업을 부르는 말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그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마치 독백극처럼 작품에 직접적으로 투영"한다고 설명합니다. 작가 본인은 독백극에 대해 "묻는 자와 답하는 자가 모두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인사이드코리아, 2016년 5월 8일).
Q. 주요 연작은 무엇인가요? A. 서울시립미술관은 〈Conversation〉, 〈Never Ending Story〉, 〈Monologue〉, 〈Relationship〉을 주요 시리즈로 꼽습니다. 〈Never Ending Story (1)〉(2004, 동판화, 60×90cm)은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입니다.
Q. 수상 이력은 어떻게 되나요? A. 2016년 제1회 TKO 국제소형판화전 금상, 같은 해 제17회 대만 국제판화비엔날레 수상이 외부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이력에는 2023년 미국 The Print Center 제97회 국제공모 Renaissance Graphic Arts Award, 2024년 빌뉴스 국제소형판화 트리엔날레 Diploma Prize, 2025년 아와가미 국제 미니어처 판화전 Cranfield Ink Prize 등이 함께 기재돼 있습니다.
Q. 원주전통판화공모전 수상자 권혜정과 같은 사람인가요? A. 다른 사람입니다. 동명이인이니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Q. 씨앗페에 나온 권혜정 작품은 무엇인가요? A. 〈Monologue〉(2015, 동판, 20x17x0.2cm) 한 점이며 가격은 ₩1,200,000입니다. 에디션 15점 중 1번입니다. 작가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Q. 작품을 사면 수익은 어디로 가나요? A.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관련 매거진
씨앗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