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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은 — 붓을 끌처럼 쥐는 사람, Hollowed 연작의 손동작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년 9월 18일 · 씨앗페

국민대에서 입체를 하고 독일에서 회화로 건너간 이지은. 그의 Hollowed 연작은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파낸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가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와 두 점의 화면을 함께 읽습니다.

이지은 — 붓을 끌처럼 쥐는 사람, Hollowed 연작의 손동작

이지은, 〈Hollowed blue 02〉,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0x30cm — 짙은 파랑 화면을 둥근 자국이 촘촘히 덮고 있다
이지은, 〈Hollowed blue 02〉,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0x30cm — 짙은 파랑 화면을 둥근 자국이 촘촘히 덮고 있다

씨앗페에 들어온 이지은의 작품은 두 점입니다. 〈Hollowed yellow 04〉와 〈Hollowed blue 02〉. 둘 다 2025년작이고, 종이판넬에 아크릴물감, 한 변이 각각 35cm와 30cm인 정사각형입니다.

'Hollowed'는 '파낸', '속을 비운'이라는 뜻입니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쪽의 말이고, 원래는 조각이나 목공의 어휘입니다. 그림 제목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물감은 얹는 것이지 파내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화면을 보면 정말로 파여 있습니다.

입체에서 출발한 사람

이지은은 국민대학교에서 입체미술을 전공해 2007년 학사, 2009년 석사를 마쳤습니다. 그 뒤 독일로 건너가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에서 순수미술로 9학기를 수학했고(2015), 2017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프란카 훼렌쉐메이어(Franka Hörnschemeyer) 교수반의 디플롬과 마이스터슐러를 마쳤습니다.

독일 미술대학에서 마이스터슐러는 디플롬을 마친 학생이 같은 교수 아래 한 해 더 남아 작업을 밀고 나가는 과정입니다. 학위라기보다 '이 교수가 자기 제자로 인정했다'는 표식에 가깝습니다. 훼렌쉐메이어는 건축 자재와 공간 구조를 다루는 설치 작업으로 알려진 작가이고, 국민대에서 입체를 전공한 사람이 그 교수반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이 작가가 독일에서도 조각·공간의 문법을 놓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독일 체류 초기의 평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011년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의 Hochschulprize(호흐슐레상) 1등, 2015년 DAAD Matching Fund 장학금입니다.

개인전은 한국과 독일을 오갑니다. 〈Studies for between spaces〉(대안공간 눈, 수원, 2015년 11월 20일12월 3일), 〈reversed〉(비젠박흐 갤러리, 쾰른, 2019년 9월11월), 〈structure〉(크비텐바움 갤러리, 뮌헨, 2023년 2월), 〈Hollowed Colors〉(아트스페이스 엣, 서울, 2025년 11월). 2025년에는 단체전 〈대한민국모던아트대상전〉(갤러리 B, 서울)에도 참여했습니다.

전시 제목만 나열해도 관심사가 보입니다. between spaces — 사이 공간. reversed — 뒤집힌. structure — 구조. hollowed — 파인. 넷 다 형태가 아니라 형태와 형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각을 공부한 사람이 회화로 건너가서도 계속 묻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는 것 혹은 한 것' — 작업 노트가 설명하는 손

이 작가에 대해서는 언론 인터뷰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대신 씨앗페 출품작 두 점에는 작가가 직접 붙인 작업 노트가 있고, 그 노트가 화면보다 먼저 말해주는 것이 많습니다.

노트의 제목은 세 언어로 병기되어 있습니다. "Doing or done / Machen oder gemacht / 하는 것 혹은 한 것." 서울과 독일을 오간 이력이 제목 한 줄에 그대로 들어 있고, 동시에 이 연작의 질문이 무엇인지도 밝힙니다 — 눈앞의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행위인가, 이미 끝난 결과물인가.

노트는 물감을 묻히는 대목부터 시작합니다.

"끌을 연마석에 갈듯이 붓에 적정량의 물감과 물을 조절하여 묻힌다. 이 과정은 중요하다. 물감이 적으면 원을 그리는 과정에서 물감이 모자라 메마른 원이 되고 물이 너무 많으면 물감이 흘러내린다." — 이지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첫 문장부터 비유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붓을 물감에 담그는 일이 끌을 숫돌에 가는 일로 설명됩니다. 그리기 전의 준비가 아니라 연장을 벼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자리를 잡는 대목입니다.

"나무판 위에 어디를 파낼지 위치를 잡듯이 캔버스 위에 시작점을 잡는다. 예전에는 그리드를 그리고 시작하였는데 이제는 그리드를 그리지 않는다. 어느 시점이 오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같은 노트

그리드를 그리지 않게 됐다는 고백이 짧게 끼어 있습니다. 규칙적으로 보이는 화면이 자로 잰 배치가 아니라 손이 기억한 간격으로 놓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오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여운까지 남깁니다. 방법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 아직 움직이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핵심은 손동작을 적은 대목입니다.

"힘을 주어 끌로 나무의 표면을 나뭇잎처럼 파내듯이 붓을 캔버스로부터 90도로 세운 상태를 유지하며 신중하게 붓을 둥글린다. 이와 동시에 나의 팔은 오른쪽 45도 각도를 따라 아래로 움직인다." — 같은 노트

두 개의 각도가 나옵니다. 붓은 화면에 90도로 서 있고, 팔은 오른쪽 아래 45도로 내려갑니다. 붓을 눕혀 끄는 일반적인 회화 동작과는 정반대입니다. 눕혀야 면이 칠해지는데, 그는 세웁니다. 세운 붓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찍거나 돌리는 것뿐이고, 그래서 화면에 남는 것이 선이 아니라 둥근 자국입니다.

마무리도 끌의 어휘로 적혀 있습니다.

"끌로 나무를 파는 행동의 마무리 지점에서 필요한 미세한 힘조절이 필요한 것처럼 붓의 이동을 멈추며 붓 밖으로 물감을 섬세하게 밀어낸다. (…) 끌을 가볍게 나무의 표면에서 떼어내듯이 움직이던 붓을 돌리던 방향으로 스냅을 주며 들어올린다. 방금 파낸 흔적이 있는 그 옆자리에 다시 끌을 내려놓듯 방금 그린 그 원형 바로 옆에 붓을 다시 올려놓을 준비를 한다." — 같은 노트

"방금 파낸 흔적이 있는 그 옆자리에 다시 끌을 내려놓듯." 한 자국을 끝내고 바로 옆으로 옮겨 다시 시작하는 반복이, 이 연작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화면의 크기는 곧 반복의 횟수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지은은 물감을 쌓아 올려서 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조각가는 재료를 덜어내 형태를 얻고, 이 작가는 재료를 더해서 덜어낸 자국을 얻습니다. 입체를 공부한 사람이 회화에서 찾아낸 방식이라 할 만합니다. '하는 것 혹은 한 것'이라는 제목도 여기서 다시 읽힙니다. 화면에 남은 것은 파인 자국(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붓이 돌아간 행위(하는 것)의 기록입니다.

씨앗페 출품작 두 점 읽기

두 점 모두 2025년작이고 정사각형이며, 옅은 나무색 액자에 흰 매트를 두른 같은 형식으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색 이름과 번호가 제목의 전부입니다.

〈Hollowed blue 02〉 — 2025년,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0x30cm

짙은 울트라마린 한 색으로 채워진 화면입니다. 그 위를 둥근 자국들이 가로 줄을 이루며 촘촘히 덮고 있습니다. 자국 하나하나가 물고기 비늘이나 꽃잎처럼 한쪽으로 살짝 겹쳐 있고, 물감이 얇게 밀려난 자리는 밝은 파랑으로, 고인 자리는 더 짙은 남색으로 보입니다. 같은 파랑인데 자국마다 밝기가 달라서, 화면 전체가 가만히 일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점 중 작은 쪽이고, 자국의 요철이 더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앞에서 읽은 노트의 90도와 45도가 실제로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이쪽입니다.

이지은, 〈Hollowed blue 02〉,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0x30cm, ₩1,200,000
이지은, 〈Hollowed blue 02〉,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0x30cm, ₩1,200,000

〈Hollowed yellow 04〉 — 2025년,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5x35cm

같은 방식, 다른 색입니다. 채도가 높은 노랑 한 색이 화면을 채우고, 그 위의 둥근 자국들은 파랑 쪽보다 훨씬 얕게 드러납니다. 멀리서 보면 고르게 칠한 노란 면처럼 보이다가, 가까이 가야 비로소 자국의 결이 어른거립니다. 화면 맨 위쪽에는 가는 어두운 선이 한 줄 지나갑니다.

노트에 "색상마다 그 농도가 다르다"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같은 손동작인데 파랑에서는 골이 깊게 보이고 노랑에서는 겨우 비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두 점을 나란히 두면 그 차이 자체가 하나의 내용이 됩니다.

이지은, 〈Hollowed yellow 04〉,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5x35cm, ₩1,400,000
이지은, 〈Hollowed yellow 04〉,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5x35cm, ₩1,400,000

두 점 다 한 변이 30~35cm인 작은 정사각형입니다. 멀리서 전체를 보는 그림이 아니라 가까이 서서 표면을 들여다보는 그림이므로, 앉는 자리 가까이 혹은 복도처럼 스치며 지나는 벽에 걸 때 제 몫을 합니다. 이지은 작가 페이지에서 두 점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추상을 처음 들이는 분께

'무엇을 그린 것인지' 묻게 되는 그림이 아닙니다. 이 연작에서 볼 것은 대상이 아니라 표면이고, 봐야 할 것은 한 번의 손동작이 남긴 자국과 그 옆에 놓인 다음 자국입니다.

고르는 기준도 그래서 단순합니다. 파랑과 노랑 중 어느 쪽 앞에 더 오래 서 있게 되는지. 색을 고르는 일이 곧 작품을 고르는 일이 되는 연작입니다. 처음 작품을 들이는 과정 전반이 궁금하시다면 처음 그림을 사는 사람을 위한 가이드를 함께 보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이지은이 씨앗페에 두 점을 낸 것은 그가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한 자국을 끝내고 그 옆에 다시 붓을 내려놓는 일을 화면 가득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옆자리를 비워두지 않는 방식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지은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 두 점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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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이지은은 어떤 작가인가요? A. 입체와 회화의 경계에서 추상 작업을 이어온 작가입니다. 국민대학교 입체미술전공 학사(2007)·석사(2009)를 마치고 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에서 순수미술 9학기를 수학했으며, 2017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프란카 훼렌쉐메이어 교수반의 디플롬과 마이스터슐러를 마쳤습니다.

Q. 'Hollowed' 연작은 어떤 작업인가요? A. 붓을 화면에 90도로 세운 채 둥글려 자국을 남기고, 그 옆에 다시 같은 동작을 반복해 한 색의 화면을 채우는 연작입니다. 작가는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에서 이 동작을 끌로 나무를 파내는 일에 견주어 설명합니다 — "나무판 위에 어디를 파낼지 위치를 잡듯이 캔버스 위에 시작점을 잡는다."

Q. '마이스터슐러'가 무엇인가요? A. 독일 미술대학에서 디플롬 과정을 마친 뒤 같은 교수 아래 남아 작업을 이어가는 과정입니다. 이지은은 2017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의 프란카 훼렌쉐메이어 교수반에서 디플롬과 마이스터슐러를 마쳤습니다.

Q. 개인전과 수상 이력은? A. 개인전으로 〈Studies for between spaces〉(대안공간 눈, 수원, 2015), 〈reversed〉(비젠박흐 갤러리, 쾰른, 2019), 〈structure〉(크비텐바움 갤러리, 뮌헨, 2023), 〈Hollowed Colors〉(아트스페이스 엣, 서울, 2025)가 있습니다. 2011년 브레멘 국립예술대학교 Hochschulprize 1등을 받았고, 2015년 DAAD Matching Fund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2025년 단체전 〈대한민국모던아트대상전〉(갤러리 B, 서울)에 참여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이지은 작품은 몇 점이고 가격은? A. 두 점입니다. 〈Hollowed blue 02〉(2025,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0x30cm, ₩1,200,000)와 〈Hollowed yellow 04〉(2025, 종이판넬·아크릴물감, 35x35cm, ₩1,400,000)입니다.

Q. 두 점을 함께 거는 것이 좋을까요? A. 같은 연작의 다른 색이라 나란히 걸면 색에 따라 자국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 바로 보입니다. 다만 크기가 30cm와 35cm로 조금 다르므로, 정확한 대칭을 원하신다면 액자 아래선이나 가운데선 중 어느 쪽을 맞출지 정해두시는 편이 좋습니다.

Q. 이지은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이지은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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