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서 35년, 마을 골목의 커뮤니티 아트부터 광장의 기록까지 붓을 놓지 않은 화가 이오연. 강제 이주의 기차역과 민들레 한 포기가 같은 화면 위에서 만나는 이유를 따라 읽습니다.
이오연 — 골목에 화단을 만들고 광장을 그리는 사람

화면 전체가 푸른 회색입니다. 안개인지 얼음인지 분간되지 않는 면이 위아래로 흐르고, 그 한가운데 반으로 자른 초록 사과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사과는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색입니다. 오른쪽 아래, 안개 속으로 검은 기관차의 형체가 어렴풋이 들어옵니다. 굴뚝에서 흰 증기가 위로 솟습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이오연의 작품 〈시간의 숲에서〉입니다. 2010년, 캔버스에 유채.
이 기차가 어디에 서 있던 기차인지는 작가가 직접 적어 두었습니다.
"러시아 고려인 강제 이주의 시작이 된 블라디보스토크 라즈돌노예 기차역 현장을 견학하고, 현장 스케치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 고려인의 불안과 우울한 현실은 화물칸에 실려져 수증기를 품어내며 강제 이주라는 고행의 길을 나선 새벽부터 시작된다." —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현장에 가서,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화면으로 옮기는 일. 이 작가가 40년 가까이 해 온 방식입니다.
수원에서 35년
이오연은 경기대학교 회화과에 다니던 시절 수원 지역 작가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2021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원은 내게 제2의 고향이다. 35년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수원사람이 다 된 것 같다." — 경기신문, 2021년 8월 23일
같은 기사는 그가 1980년대부터 '수원민주문화운동연합'과 미술동인 '새벽', '민족미술인협회' 등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문화예술을 매개로 마을 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해 다양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해 열린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수원시립미술관의 협력기획전 《바람보다 먼저》였습니다. 1979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수원·경기·인천·광주 등지에서 터져 나온 사회참여적 미술을 조망한 전시로, 41인(팀)의 작품 189점과 아카이브 200여 점으로 꾸려졌습니다. 이오연은 수원 소집단 여섯 곳의 발생부터 해체까지 관여한 핵심 인물 11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1부에 소개됐습니다.
그 1부에 함께 놓인 소집단의 이름들이 1980년대 수원 미술의 지형을 보여줍니다. 포인트(POINT), 시점·시점(時點·視點), 목판모임 '판', 수원문화운동연합, 미술동인 '새벽', 노동미술연구소. 여섯 소집단의 아카이브 약 150점이 연대순으로 함께 전시됐습니다. 이 전시를 보도한 경기신문은 민중미술을 "1980년대 격변하던 한국의 시대변화에 발맞춰 태어난 사회참여적 미술"로 설명하면서, 이 전시가 "1980년대 집단적 사회참여 예술 활동 이후, 꾸준히 개인 작업을 예술로 승화시켜 온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라고 짚었습니다. 이오연이 서 있는 자리가 정확히 그곳입니다.
전시 제목은 김수영의 시 〈풀〉에서 왔습니다. 당시 수원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유연하고 강인해서 바람에도 뿌리 뽑히지 않는 생명력을 자랑하는 풀"이 민중의 주체성을 집약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글 뒤쪽에서 만날 이오연의 민들레와 질경이가 이 문장과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민중미술의 흐름 전반에서 그의 자리를 짚는다면, 1980년대 집단 활동의 참여자이면서 그 방식을 지금까지 개인 작업으로 이어 온 쪽입니다.
커뮤니티 아트 — 예술가가 살면 동네가 달라진다
이오연의 활동은 전시장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수원 인도래창작소의 대표 작가로 골목에 문화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창작소가 자리 잡기 전 빛바랜 간판을 새로 칠하고 현수막을 철거하며 환경을 정비한 일부터가 작업의 일부였습니다.
'인도래'라는 이름의 유래도 그가 직접 밝혔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지워진 수여선길과 화성역을 품고 있는 인도래 옛길에서 따온 이름이다. 옛 것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 경기신문 인터뷰
그리고 그가 커뮤니티 아트를 중시하는 이유.
"예술가가 마을에 살면 동네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소통이 전제되지 않은 예술은 어려울 수 있다." — 같은 인터뷰
2020년에는 자신이 주축이 된 수원 지역 5인 단체 '더그림ING'로 말박물관 초대전 《그리움》을 열었습니다. 말박물관이 초대작가 공모에서 지역 예술단체를 우대해 선발한 첫 사례였고, 코로나19로 개막과 전시가 온라인으로 진행됐습니다. 이 전시에서 그는 "광활한 대지를 내달리던 선조들의 삶에 대한 동경"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2021년 말에는 평창 평화도시 선포 2주년을 기념한 '수원-평창 평화미술 교류전'에 〈아버지의 땅〉을 냈습니다. 30여 년 동안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활동해 온 수원민족미술협회 작가 30명의 작품 40여 점이 함께 걸린 자리였습니다.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에 따르면, 그는 1997년 인사동 21c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2017년부터는 'SFA(현장 예술가)'를 구축해 예술이 갈등과 소외의 공간에서 쓰이고 소통하는 일에 관심을 쏟아 왔습니다. 같은 소개는 홍익대학교 문화예술원과 경기대 예술대 강의를 역임했고, 2013년 문학 동인 활동을 시작해 2026년 그림시집 『봄으로부터』를 펴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밀려난 자리를 응시하는 그림
2025년 5월 22일, 수원 고색뉴지엄에서 이오연의 초대 개인전 《빛의 울림으로》가 개막했습니다. 회화 40여 점이 걸렸고 6월 8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전시장이 된 고색뉴지엄은 2016년 고색동 산업단지 안의 폐수종말처리장을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생한 곳입니다.
경기일보는 이 전시를 "도시 개발과 자본 논리에서 밀려난 존재들을 섬세하게 포착한" 자리로 소개하며 작가의 말을 전했습니다.
"환경과 개발, 노동 현실 등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가지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호응하려 했다. 현장의 리얼리티를 반영하는 창작활동을 하고,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포착하고자 했다." — 경기일보, 2025년 5월 22일
전시에는 고 김민기의 노래를 오마주한 〈봉우리〉(2024), 1970~80년대 산업화의 노동 현실을 되짚는 〈공장의 불빛〉, 그리고 2024년 겨울 광장의 풍경을 담은 〈키세스 시위단〉이 함께 걸렸습니다. 경기일보는 이 전시를 두고 작가가 "거대한 담론 대신 작고 조용한 존재들의 삶에 귀 기울"인다고 적었습니다. 전시장이 된 고색뉴지엄은 올해부터 수원민예총이 위탁운영을 맡아 다시 문을 연 참이었습니다.
봄이라는 말과 붉은색
이오연은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에 따르면 그는 2013년 문학 동인 활동을 시작해 그림과 시를 함께 묶은 책 『봄으로부터』를 펴냈습니다. 같은 자료에 실린 문학평론가 조성면의 평문 일부는 그의 '봄'이 계절 이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직 머나먼 봄', '봄다운 봄은 그렇게( 오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보듯, 그에게 봄은 독립과 통일, 진실의 인양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도달하는 '완성된 정의'의 다른 이름이며, 그때 가서야 비로소 온몸으로 받아 들여지고 느껴지는 계절이다." — 조성면 문학평론가의 평문 일부, 작가가 씨앗페에 제출한 소개에 수록
평문은 이어 그의 화면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이 강하게 대비된다고 지적하며, 그것을 "희생(Red)을 통해 쟁취해야 할 희망(Blue)의 이중주"로 읽습니다. 이 색의 짝은 아래에서 볼 출품작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시간의 숲에서〉의 화면은 온통 푸른 회색이고, 두 점의 풀 그림에는 붉은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같은 해 12월,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은 현대미술 작가 26명이 참여한 기획전 《빛의 연대기》를 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과 항일독립운동부터 4·19, 5·18, 6·10 항쟁을 거쳐 2024년 겨울의 집회까지를 '빛'이라는 코드로 재구성한 전시였습니다. 한국일보는 전시작을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오연의 아크릴화는 대통령 관저 앞에서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밤새 버틴 일명 '키세스 시위대'를 그렸다."
전시장에는 신학철, 오윤, 홍성담 등 앞선 세대 작가들의 작품과 2025년의 신작이 나란히 걸렸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세 점 읽기
씨앗페에 들어온 이오연의 작품은 세 점입니다. 2010년 작 한 점과 2026년 작 두 점. 앞의 한 점은 먼 곳의 역사를, 뒤의 두 점은 발밑의 풀을 다룹니다. 그런데 작가가 붙인 노트를 읽으면 셋이 한 줄에 놓입니다.
〈시간의 숲에서〉 — 2010년, 캔버스에 유채
앞에서 본 그 기차입니다. 화면은 대부분 푸른 회색이고, 유일하게 선명한 것이 가운데 놓인 반쪽 사과입니다. 기관차는 오른쪽 아래 구석에서 희미하게 나타나 흰 증기만 또렷하게 올립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사건을 화면 정면에 세우지 않는 방식입니다.
작가의 노트에 따르면 이 그림은 블라디보스토크 라즈돌노예 역의 현장 스케치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토굴촌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암시합니다. 노트는 이 작업이 우수리스크 고려인 이민 100주년 기념 회관 건립 축하연에 참석해 고려인 초상을 그리던 무렵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세 점 가운데 유일하게 아직 주인을 기다리는 작품입니다.

- 캔버스에 유채 · 2010 · 크기 확인 중 · ₩1,500,000
- 작품 페이지 →
〈민들레 1〉 — 2026년, 캔버스에 유채, 24.2x33.4cm
민들레 한 포기가 화면을 꽉 채웁니다. 노란 꽃 넷이 서로 다른 높이로 올라와 있고, 그중 하나는 아직 봉오리입니다. 톱니처럼 깊게 갈라진 잎이 사방으로 뻗어 바닥을 덮습니다. 배경은 얼룩진 회녹색이고, 왼쪽 가장자리와 오른쪽 아래에 붉은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꽃 한 송이가 아니라 뿌리에서 잎까지 한 포기를 통째로 그렸다는 점이 이 그림의 성격을 말합니다. 꺾어서 담은 꽃이 아니라 땅에 붙어 있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작가가 이 작품에 붙인 설명은 한 문장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민들레는 강인함과 행복, 희망의 꽃말로 불려진다." —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 24.2x33.4cm · 캔버스에 유채 · 2026 · 판매 완료
- 작품 페이지 →
〈질경이 1〉 — 2026년, 캔버스에 유채, 24.2x33.4cm
민들레와 짝을 이루는 작품입니다. 같은 해, 같은 크기, 같은 재료. 질경이는 길가에 나서 사람 발에 밟히며 자라는 풀입니다.
작가의 노트가 그 이유를 밝힙니다.
"대지에 자라고 꽃피는 질경이의 꽃말은 발자취다. 끈기, 인내, 강인한 생명력, 희망처럼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상징으로 민족의 수난을 이겨내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 —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작업 노트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바람보다 먼저》의 제목이 빌려 온 김수영의 〈풀〉과 같은 자리입니다. 강제 이주의 기차를 그린 사람이 발밑의 잡초를 그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둘 다 밟힌 것에 대한 그림입니다.

- 24.2x33.4cm · 캔버스에 유채 · 2026 · 판매 완료
- 작품 페이지 →
세 점을 나란히 놓으면 이 작가의 시선이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지 보입니다. 국경을 넘어간 사람들의 새벽과, 동네 골목에 나 있는 풀 한 포기. 이오연 작가 페이지에서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이오연이 씨앗페에 세 점을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예술가가 마을에 살면 동네가 달라진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골목에 화단을 만들고 빛바랜 간판을 다시 칠하던 손이, 동료 예술인의 사정이 걸린 자리에도 그림을 내놓았습니다. 하던 일의 범위가 조금 넓어졌을 뿐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함께 읽으면 좋은 글들을 소개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오연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수원을 기반으로 활동해 온 화가입니다. 경기대학교 회화과 재학 중 수원 지역 작가들과 인연을 맺었고, 1980년대부터 '수원민주문화운동연합'과 미술동인 '새벽', '민족미술인협회' 등에서 활동했습니다(경기신문, 2021년 8월 23일). 환경·노동·인권을 주제로 한 현장 미술과 커뮤니티 아트를 이어 왔습니다.
Q. '커뮤니티 아트'란 무엇인가요? A. 경기일보는 작품의 생산과 소비가 지역 공동체에 기반을 둔 미술 실천으로 설명합니다. 이오연은 수원 인도래창작소의 대표 작가로 골목에 문화길을 조성해 왔으며, "예술가가 마을에 살면 동네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소통이 전제되지 않은 예술은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Q. 최근 어떤 전시에 참여했나요? A.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수원시립미술관 협력기획전 《바람보다 먼저》, 2025년 5월 고색뉴지엄 초대 개인전 《빛의 울림으로》(회화 40여 점), 같은 해 12월 서울 민주화운동기념관 기획전 《빛의 연대기》에 참여했습니다. 《빛의 연대기》에는 그의 아크릴화 〈키세스 시위단Ⅱ〉가 소개됐습니다(한국일보, 2025년 12월 3일).
Q. 〈시간의 숲에서〉는 무엇을 그린 것인가요? A. 작가가 씨앗페 출품작에 붙인 노트에 따르면, 러시아 고려인 강제 이주가 시작된 블라디보스토크 라즈돌노예 기차역을 견학한 뒤 현장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화면에는 푸른 안개와 반으로 자른 사과, 그리고 증기를 뿜는 기관차가 등장합니다.
Q. 민들레와 질경이를 왜 그렸나요? A. 작가는 민들레를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강인함과 희망의 꽃으로, 질경이를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끈기와 생명력의 상징으로 설명했습니다. 두 점 모두 2026년 작이며 크기도 같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이오연 작품은 몇 점인가요? A. 세 점입니다. 〈시간의 숲에서〉(2010, 캔버스에 유채, 크기 확인 중, ₩1,500,000), 〈민들레 1〉(2026, 24.2x33.4cm, 판매 완료), 〈질경이 1〉(2026, 24.2x33.4cm, 판매 완료)입니다.
Q. 작품을 사면 수익은 어디로 가나요? A.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관련 매거진
씨앗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