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첫 판화는 이웃 농민의 얼굴이었다. 공장 바닥 고무판을 조각도로 깎아 시작한 이윤엽은 스스로를 파견미술가라 부르며 대추리·용산·희망버스의 현장에서 판을 새겼다. 씨앗페 2026 출품 아홉 점.

이윤엽의 첫 판화는 이웃의 얼굴이었다.
1996년 〈산드래미 최씨〉. 당시 살던 집 근처에 살던 농민을 새겼다. 판은 나무가 아니라 공장 바닥에 까는 고무판이었고, 도구는 조각도였다. 이 한 점 이후 판화가 그의 매체가 됐다.
굵은 선과 흰 여백
이윤엽은 1968년에 태어나 수원대학교 서양화과를 1997년에 졸업했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그가 오래 붙든 것은 판이다. 농부와 노동자, 주변의 소박한 사물들을 재치 있게 새긴다. 흰 여백 위에 굵은 선.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목판화의 특징이 그 화면에 그대로 있다.
작가에게 목판화는 표현 수단만이 아니다. 나무를 깎고 도구를 다루며 몸을 움직이게 하는 매체다. 그래서 목판화는 노동을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감을 만들어내거나, 노동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된다.
파견미술가
이윤엽은 스스로를 '파견미술가'라고 부른다.
이 말이 생긴 자리가 있다. 2004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으로 마을이 사라지던 그곳에서 그는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참여연대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대추리 이후 싸움의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 문화판 사람들이 투쟁 현장에 많이 나타나"면서 '파견미술가'라 불리는 작가들의 활동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 이후의 현장이 이어진다. 용산, 기륭전자, 2012년 희망버스. 용산 참사 현장의 "여기 사람이 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에 걸린 "해고는 살인이다" — 그 문장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수원에서 서울로, 동탄으로, 대추리로, 안성으로. 거처가 옮겨간 자리마다 현장이 있었다.
2012년 구본주예술상을 받았다. 요절한 조각가 구본주의 이름을 딴 상이다.
미술관에 걸린 판

현장의 판화는 미술관으로도 들어갔다.
2015년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광주시립미술관), 2017년 《층과 층 사이》(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년 《광장: 미술과 사회》(국립현대미술관), 2020년 《판화, 판화, 판화》(국립현대미술관). 2024년에는 동두천 생태평화미술관 더꿈에서 개인전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를, 2025년에는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잘린 문장 열린 광장》을 열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일본 사키마미술관과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나는 농부란다》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를 펴내기도 했다.
다색목판이라는 셈법

씨앗페 출품작 중 몇 점에는 '다색목판 60장 중에서', '다색목판 48장 중에서'라는 표기가 붙어 있다.
한 판에서 찍어낸 여러 장 가운데 한 점이라는 뜻이다. 〈콩밭메는 할머니2〉는 60장 중 한 점, 〈좋은소식〉은 48장 중 한 점이다. 목판화가 애초에 여러 사람의 손에 갈 수 있게 만들어진 매체라는 사실이 표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장에서 나눠 쓰던 판화의 성격과도 멀지 않다.
안는 손

씨앗페 2026 출품작 아홉 점은 2009년부터 2025년까지 걸쳐 있다.
〈콩밭메는 할머니2〉(2009)에서 〈붉은 봄 매화〉(2018), 〈행복한 나날 2020〉(2020), 〈무슨일 있어?〉(2022)를 지나 2025년의 〈좋은소식〉·〈북한산 2025〉·〈튼튼한 감나무〉·〈나를 안는다〉까지. 밭을 매는 노인과 매화, 감나무와 산이 한자리에 있다.
〈나를 안는다〉는 제목이 다른 곳을 향한다. 오래 바깥의 현장을 새겨온 손이 자기 쪽으로 돌아선 자리다.
판이 남기는 것
이윤엽은 씨앗페 2026에 아홉 점을 냈다.
한국 예술인의 84.9%가 제도 금융에서 배제된다. 씨앗페 출품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이 판매되어 만드는 상호부조 기금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에게 저금리 대출로 이어진다.
파업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판을 깎아온 작가가 동료 예술인을 위한 기금에 작품을 내놓는 일은, 그가 오래 해온 일과 다른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이윤엽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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