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84년 민중미술 화가로 다시 붓을 든 박진화. 휴전선을 지척에 둔 강화도 화실에서 분단을 그려온 작가의 40년과 씨앗페 출품작 다섯 점을 안내합니다.
박진화 — 대신 울어주는 붓, 장흥에서 강화 볼음도까지

박진화는 자신이 어떤 화가이기를 바라는지 한 단어로 말해둔 적이 있습니다. 대곡자(代哭子) — 세상의 아픔에 대신 울어주는 사람. 현실의 사회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자리를 자처하며 그려왔다고 그는 말합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그의 작품은 다섯 점입니다. 모두 2025년작이고, 제목은 〈정물1〉·〈정물2〉·〈정물3〉과 〈근처1〉·〈근처2〉입니다. 정물과 근처. 대곡자를 자처한 화가가 근작의 제목으로 고른 두 단어치고는 조용합니다.
그 조용함을 읽으려면 앞을 봐야 합니다. 이 화가는 옥고를 치렀고, 서울을 떠나 휴전선이 보이는 곳에 화실을 냈고, 민족미술인협회의 회장을 지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걸은 뒤에 보면 〈근처〉라는 제목이 다르게 읽힙니다.
1984년을 화력의 출발점으로 삼는 사람
박진화는 1957년 전남 장흥 안양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981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화력(畵歷)이 1981년에 시작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더니즘을 떠나 현실파, 곧 민중미술 화가로 다시 붓을 든 1984년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대학을 나온 해가 아니라 무엇을 그릴지 정한 해를 화력의 첫해로 세는 방식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학교 4학년 재학 시절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고, 이를 계기로 시대정신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 그는 구속됩니다. 서울미술공동체 소속으로 '20대 힘전' 사건을 주도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한 사건이었고, 그는 옥고를 치렀습니다. 당시 그의 직업은 고등학교 미술교사였습니다.
교사가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시대. 1980년대 민중미술을 이야기할 때 '탄압'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 들릴 때가 있지만, 이 한 줄은 구체적입니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사람이 전시 하나로 감옥에 갔습니다.
1989년 한강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엽니다. 옥고로부터 4년 뒤입니다.
서울을 떠나 휴전선 쪽으로
1991년, 박진화는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나 강화도에 자리를 잡습니다.
화가가 작업실을 옮기는 일은 대개 임대료나 공간의 문제입니다. 이 경우는 다릅니다. 강화도로 작업 근거지를 옮긴 뒤 그의 예술은 분단이라는 한국적 현실과 더 깊이 맞닿습니다. 그는 휴전선을 지척에 둔 화실에서 작업해 왔습니다.
이 선택을 본인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민통선 마을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단에 대한 아픔을 느낄 수 있다"며 "작업실을 강화도의 북쪽 변방에 얻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 경인일보, 2015년 4월 1일
'행운'. 분단선 근처에 살게 된 것을 행운이라 부르는 화가의 어법이 이 작업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린 대상이 있는 자리로 가서 사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2009년, 그 자리는 박진화미술관이 됩니다. 강화도 작업실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단 미술관을 연 것입니다. 지금 그는 강화군의 서북쪽 경계에 있는 섬 볼음도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8년 시점에도 그가 볼음도에서 작업 중이었음이 외부 보도로 확인됩니다.
조직의 일도 함께 맡았습니다. 2013년 2월 그는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임기는 3년으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회장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시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민족미술인협회 회장 자격으로 이름이 올랐습니다. 1985년 구속에서 2010년대 블랙리스트까지, 30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종류의 목록에 두 번 이름이 오른 셈입니다.
작업의 문법 — 땅의 영혼, 그리고 서서 그리기
박진화의 예술관은 한 문장으로 요약돼 있습니다.
"화가의 영혼은 그가 사는 땅의 영혼과 맥락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이 문장을 그대로 실행한 결과가 1991년의 이주입니다. 분단을 그리려면 분단선 곁에 살아야 한다는 논리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소재를 찾아 잠시 다녀오는 것과 거기서 30년을 사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작업의 물리적 방식에 대해서도 그는 직접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18년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드로잉 개인전 현장에서 취재기자에게 한 말입니다.
"힘이 느껴져요? 내 드로잉 작업에는 비밀이 있거든. 내가 기자님께 알려드릴게. 나는 드로잉 작업을 할 때 앉아서 안 하고 서서해요. 생각해봐요. 앉아서 하면 사물을 품을 때 어깨까지만 움직이잖아. 그런데 서서 하면 내 온몸이 사물을 품게 돼요. 나는 그게 참 좋더라구. 사물을, 풍경을 온몸으로 품는. 대신 힘이 많이 들긴해요. 며칠을 그렇게 드로잉 작업을 하고 나면 드러눕기도 해요." — 오마이뉴스, 2018년 3월 21일
같은 자리에서 그는 연필 이야기도 했습니다.
"내가 우리 할배, 할매들을 그릴 때 연필을 온갖 종류를 다 썼어요. HB도 쓰고 4B도 쓰고, 아마 한 9종류는 사용해서 저 작업을 했지. 사람마다 느낌이 틀리니까. 기자님도 가까이 와서 한번 봐요." — 오마이뉴스, 2018년 3월 21일
'사람마다 느낌이 틀리니까.' 아홉 종류의 연필을 쓰는 이유가 기법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리는 대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는 대답입니다. 온몸으로 품는다는 말과 같은 자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삼년상'이라는 말
박진화가 자기 작업의 시간 감각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발언은 2014년 인터뷰에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봐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온 국민이 전부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듯했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그만 좀 하라'고 이야기한다"며 "꾸준히 지속적으로, 진심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두가 무관심해진 지금, 나는 세월호에 관한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다. 3년간의 작업기간이 곧 내가 그들을 위해 치르는 삼년상이다." — 독서신문, 2014년 11월 12일
'삼년상.' 작업 기간을 상례에 빗대는 화가의 어법에 '대곡자'라는 자기규정이 그대로 겹칩니다.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하는 일은 한 번 우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기간 동안 계속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점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질 때가 아니라 '모두가 무관심해진 지금' 시작하겠다고 말합니다. 사건을 다루는 미술이 흔히 빠지는 자리 — 화제가 뜨거울 때 화면을 내놓는 자리 — 의 정반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2026년
2026년 4월 3일부터 4월 30일까지, 전남 장흥의 이로우미 갤러리(장흥힐링테라피센터)에서 초대전 「심고(心告)2」가 열렸습니다. 1957년 장흥에서 태어난 화가가 고향에서 연 전시입니다.
전시에 부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그림은 내가 그린 것만이 아니라 고향과 시대가 함께 울린 결과물"이라며, "이번 최신작들을 통해 장흥의 주민들과 예술적 심언(心言)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뉴스메이커, 2026년
'고향과 시대가 함께 울린 결과물.' 앞에서 읽은 "화가의 영혼은 그가 사는 땅의 영혼과 맥락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와 같은 말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사는 땅(강화)이 아니라 태어난 땅(장흥)이 주어입니다.
씨앗페 출품작 다섯 점 읽기
씨앗페에 들어온 박진화의 작품은 다섯 점이고, 모두 2025년작입니다. 제목은 〈정물〉 세 점과 〈근처〉 두 점으로 나뉩니다. 화면은 60x72cm 안팎으로 고르고, 〈근처1〉만 72x60cm의 세로입니다. 가격은 다섯 점 모두 ₩8,000,000입니다.
값과 크기가 같으니 고르는 기준은 두 계열의 제목뿐입니다. '정물'은 미술사에서 가장 오래된 장르 이름 가운데 하나이고, '근처'는 장르 이름이 아니라 거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대곡자를 자처한 화가가 근작에서 이 두 계열을 나란히 내놓았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근처1〉 — 2025년, 유화, 72x60cm
다섯 점 가운데 유일한 세로 화면입니다. 재료는 유화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 2025년 · 72x60cm · 유화 · ₩8,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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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2〉 — 2025년, 60x72cm
〈근처1〉과 짝을 이루는 가로 화면입니다. 두 점을 나란히 걸면 같은 제목이 세로와 가로로 갈라지는 구성이 됩니다.

- 2025년 · 60x72cm · ₩8,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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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1〉 — 2025년, 유화, 캔버스, 60x71.9cm
다섯 점 가운데 재료 표기가 가장 자세한 작품입니다(유화, 캔버스).

- 2025년 · 60x71.9cm · 유화, 캔버스 · ₩8,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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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2〉 — 2025년, 60x72cm
〈정물〉 연작의 두 번째입니다.

- 2025년 · 60x72cm · ₩8,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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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3〉 — 2025년, 60x72cm
〈정물〉 연작의 세 번째입니다. 세 점을 나란히 두면 한 해에 같은 제목으로 이어진 화면의 순서가 보입니다.

- 2025년 · 60x72cm · ₩8,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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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화 작가 페이지에서 다섯 점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서의 자리
박진화는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 자리를 표시하는 좌표는 세 개입니다.
첫째는 1985년입니다. 서울미술공동체 소속으로 '20대 힘전' 사건을 주도해 구속된 이력은 1980년대 미술 운동이 실제로 어떤 압력 아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민중미술의 흐름 전반을 읽을 때, 이 시기의 전시가 종종 전시장 바깥에서 결말을 맞았다는 사실을 함께 놓아야 합니다.
둘째는 1991년의 이주입니다. 민중미술의 여러 갈래 가운데 그는 분단을 택했고, 그 주제를 다루기 위해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갔습니다. 2009년 그 자리에 미술관을 열었고, 지금은 더 서북쪽의 섬 볼음도에서 작업합니다. 40년 가까이 지도 위에서 북쪽으로 조금씩 이동해온 화가입니다.
셋째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의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회장직입니다. 작업과 조직을 함께 감당한 이력이고, 그 대가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이 세 좌표를 잇는 선이 '대곡자'라는 자기규정입니다. 대신 우는 사람은 자기 슬픔을 말하지 않습니다. 남의 슬픔이 있는 자리로 가서 그 곁에 오래 머무릅니다. 1985년의 감옥도, 1991년의 이주도, 삼년상이라는 작업 기간도 같은 문법으로 읽힙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박진화가 씨앗페에 다섯 점을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대곡자를 자처한 화가가 동료 예술인을 위해 다섯 점을 내놓는 일에는 따로 붙일 설명이 없어 보입니다. 모두가 무관심해진 자리에서 작업을 시작하겠다던 사람의 방식과, 금융의 바깥으로 밀려난 예술인 쪽에 서는 일은 같은 방향을 봅니다.
박진화를 처음 만나는 분이라면 순서를 이렇게 잡아보시길 권합니다. 먼저 '대곡자'라는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다음으로 1991년에 그가 왜 서울을 떠났는지, "작업실을 강화도의 북쪽 변방에 얻게 된 것은 행운"이라는 말을 다시 읽으십시오. 그 뒤에 〈근처〉 두 점의 제목을 보시면 됩니다. 분단선 근처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화가가 쓴 '근처'라는 말은, 사전의 뜻보다 조금 더 멀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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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박진화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57년 전남 장흥 안양면에서 태어난 민중미술 화가입니다. 1981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했고, 모더니즘을 떠나 현실파(민중미술) 화가로 다시 붓을 든 1984년을 화력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1991년 강화도로 작업 근거지를 옮겨 휴전선을 지척에 둔 화실에서 작업해 왔으며, 현재는 강화군 볼음도에서 그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 '20대 힘전' 사건은 무엇인가요? A. 1985년, 박진화는 서울미술공동체 소속으로 '20대 힘전'을 주도해 구속되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한 사건이었으며, 당시 그는 고등학교 미술교사였습니다.
Q. 왜 강화도로 갔나요? A. 1991년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나 강화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분단이라는 한국적 현실과 맞닿는 작업을 위해서였고, 본인은 "민통선 마을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단에 대한 아픔을 느낄 수 있다"며 "작업실을 강화도의 북쪽 변방에 얻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습니다(경인일보, 2015년 4월 1일). 2009년에는 강화도 작업실 인근에 박진화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Q. '대곡자'는 무슨 뜻인가요? A. 세상의 아픔에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박진화가 스스로를 규정한 말입니다. 현실의 사회적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대곡자(代哭者)'를 자처하며 작업해 왔습니다.
Q. 협회 활동과 블랙리스트 이력은? A. 2013년 2월 (사)한국민족미술인협회 신임 회장으로 선출돼 임기 3년(2013~2015)을 채웠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민족미술인협회 회장 자격으로 이름이 올랐습니다.
Q. 최근 전시는? A. 2026년 4월 3일부터 30일까지 고향인 전남 장흥의 이로우미 갤러리(장흥힐링테라피센터)에서 초대전 「심고(心告)2」를 열었습니다. 작가는 "내 그림은 내가 그린 것만이 아니라 고향과 시대가 함께 울린 결과물"이라고 밝혔습니다(뉴스메이커, 2026년).
Q. 박진화 작품 가격대는? A. 씨앗페에 나온 다섯 점은 모두 ₩8,000,000입니다. 전부 2025년작이고 화면도 60x72cm 안팎으로 고르므로, 〈정물〉과 〈근처〉 두 계열 가운데 어느 쪽을 들일지로 고르시면 됩니다.
Q. 박진화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박진화는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박진화 작품은 몇 점인가요? A. 〈정물1〉(유화, 캔버스, 60x71.9cm), 〈정물2〉(60x72cm), 〈정물3〉(60x72cm), 〈근처1〉(유화, 72x60cm), 〈근처2〉(60x72cm) 다섯 점이며 모두 2025년작입니다. 작가 페이지에서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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