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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 — 경찰 조서에 적힌 직업란 한 칸에서 시작된 화가

작가를 만나다 · 발행 2026년 9월 17일 · 씨앗페

목수로 일하다 벽화 현장에서 연행됐고, 경찰이 직업란에 "화가"라고 적으면서 화가가 됐습니다.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에서 얼음 펭귄까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최병수의 40년을 따라 읽습니다.

최병수 — 경찰 조서에 적힌 직업란 한 칸에서 시작된 화가

최병수, 〈장산곶매〉, 한지에 목판, 84.7x45.6cm — 1990년 목판 작업
최병수, 〈장산곶매〉, 한지에 목판, 84.7x45.6cm — 1990년 목판 작업

한국 미술가 가운데 자기 직업의 출발점을 경찰 조서로 지목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최병수가 그런 경우입니다.

"조사과정에서 직업을 묻기에 목수라 했더니 목수는 안 된다 해서 타이핑치면서 나의 직업을 '화가'라고 쓰더라고. 독재정권 때문에 1호 관제화가 된 거야. 이후 화가 나면 난 무작정 그림을 그렸지." — 오마이뉴스, 2019년 6월

'1호 관제화가'.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관계는 정확합니다. 1986년, 그는 목수였고 미술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해 신촌 벽화사건과 정릉 벽화사건에 연루돼 경찰 조사를 받았고, 경찰이 그의 직업을 '목수' 대신 '화가'로 기재하면서 그는 화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최병수의 작품은 두 점입니다. 〈장산곶매〉(1990, 한지에 목판)와 〈그림움이 물들면〉(2025, 철제). 35년의 간격을 둔 두 점이고, 하나는 종이 위의 목판, 하나는 5미터에 이르는 철 작업입니다.

화가가 되기 전의 19가지 직업

최병수는 1960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직후 서울 동작구 상도동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가정형편 때문에 전수학교(중학교 과정)를 중퇴한 뒤 그는 노동 현장을 전전했습니다. 신문팔이, 중국집 배달원, 보일러공, 전기공, 목수. 정규 미술교육은 받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그 이력을 결핍이 아니라 조건으로 설명합니다.

"저는 학교를 안 다녔어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지요. 그래서 저는 그 어떤 고정관념에도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또한, 화가가 되기 전에 저는 다양한 일을 해 봤습니다. 보일러 기사, 중국집 배달부, 웨이터, 목수 등 대략 19가지 정도 한 것 같아요. 이런 다양한 경험들이 저의 상상력의 자양분이 되지요." — 여수넷통뉴스

19가지. 이 숫자를 미술 이력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보일러를 고쳐 본 사람은 배관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알고, 목수 일을 한 사람은 나무를 어디서 잘라야 버티는지를 압니다. 뒤에 그가 대형 걸개그림과 야외 설치, 얼음 조각으로 옮겨갈 때 필요했던 것이 정확히 그런 지식입니다. 미술대학에서 가르치지 않는 종류의 지식입니다.

1986년, 사다리를 짜주러 갔다가

화가가 된 경위는 본인의 구술이 가장 자세합니다.

"1986년에 시작했죠. 목수일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서울 신촌에 벽화를 그리게 사다리를 짜달라는 거예요. 사다리를 짜준 뒤 그림이 지워지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친구들이 약이 오르니까 또 다른 곳에 벽화를 그린 거예요. '너도 같이 그려라' 해서 꽃 몇 개 그렸죠. 한데 경찰이 이념화된 그림이라며 그걸 또 지우는 거예요. 그래서 대치하다가 경찰차에 끌려 들어갔죠. 성북경찰서로 갔는데, '직업이 뭐냐?' '목수다.' 그랬더니 '화가들하고 끌려왔기 때문에 직업을 화가로 해야 한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화가가 됐죠." — 한겨레21

사다리를 짜주러 갔다가, 꽃 몇 개를 그렸다가, 화가가 됐습니다. 이 이야기가 한 개인의 우스운 일화로만 남지 않는 것은, 같은 사건 안에 그 시대의 작동 방식이 통째로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벽에 그림을 그리면 지운다. 지우면 다시 그린다. 다시 그리면 잡아간다. 잡아간 자리에서 국가가 한 사람의 직업을 정해 준다.

그는 민족미술협의회에 가입해 벽화분과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사다리를 짜던 사람이 민중미술의 한복판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1987년의 걸개그림

그리고 이듬해, 그의 이름을 한국 현대사에 남긴 작업이 나옵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대형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연세대학교에 설치된 이 그림은 6월 항쟁의 이미지 그 자체가 됐습니다.

걸개그림이라는 형식을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술관 벽에 거는 그림이 아니라 건물 외벽에 내거는 그림입니다. 관객이 표를 사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지나던 사람이 올려다봅니다. 크기가 클수록 멀리서 보이고, 멀리서 보일수록 많이 보입니다. 미술의 유통 경로를 통째로 건너뛰는 형식이고, 목수의 기술이 그림의 기술만큼 필요한 형식입니다.

30년 뒤, 그는 같은 자리로 돌아갑니다. 2017년 이한열 열사 30주기를 맞아 연세대학교 이한열 동산에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본뜬 쇠 동상(높이 3m·폭 1.2m)을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천에 그린 그림을 30년 뒤에 쇠로 다시 세운 것입니다.

그때 그가 한 말이 남아 있습니다.

"8년 만에 처음 이 열사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을 때 어머니께서 '고생하셨네'라는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셨다" — 연합뉴스, 2017년 6월 7일

"우리는 모두 이한열 열사에게 피로 빚을 졌다"며 "그때 거리에 나가 쓰러진 사람은 이한열이었지만, 이한열이 아닌 최병수나 다른 누군가가 희생될 수도 있었다" — 연합뉴스, 2017년 6월 7일

자기 대표작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작가는 드뭅니다. 그 그림이 자기 성취가 아니라 자기가 진 빚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1989년에는 〈노동해방도〉를 제작했습니다. 제목이 그대로 주제인 그림입니다. 걸개그림이라는 형식에서는 제목이 은유일 필요가 없습니다. 멀리서 한 번에 읽혀야 하는 화면이기 때문입니다. 전시장에서 도록을 펴 놓고 읽는 그림과, 거리를 지나며 몇 초 안에 알아봐야 하는 그림은 애초에 다른 규칙으로 만들어집니다. 최병수의 1980년대 작업은 후자의 규칙을 따릅니다.

거리에서 지구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최병수의 활동 영역은 넓어집니다. 현장미술가·설치작가·환경운동가로, 1996년부터 국제 환경회의 현장에서 얼음 펭귄 조각 같은 환경 관련 퍼포먼스와 설치를 선보였습니다.

얼음으로 펭귄을 만들어 국제 환경회의장에 놓는다는 발상에는 걸개그림과 같은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 없고, 지나가던 사람이 바로 알아보고, 그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미술관에 들어가 보존되는 대신 현장에서 소진되는 작업입니다. 벽화가 지워지던 자리에서 출발한 작가가 아예 녹아 없어지는 재료를 고른 셈입니다.

2000년대 중반 그는 전남 여수 백야도로 이주해 정착했고, 환경보호를 주제로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그 사이에 겪은 일도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원이 끊기는 불이익을 겪었습니다.

"4~5년 전 김해시에서 봉화마을을 비롯 십여군데 마을에 자음과 모음으로 마을을 꾸미기 작업을 했지. 그런데 공사계약에 김해시장이 도장까지 찍었는데 문체부에서 잘라버렸어. 그 이유가 내가 블랙리스트였던 거야. 세월호 진상규명하라 외치고, 민주적인 후보를 지지했더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지원금을 끊은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 오마이뉴스, 2019년 6월

1986년에는 그림을 지웠고, 2010년대에는 계약을 잘랐습니다. 방식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2020년에는 광주광역시 갤러리 생각상자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별이 된 이한열〉 등 20여 점을 전시했습니다. 화가가 된 지 34년 만의 첫 개인전입니다. 이 사실 하나가 이 작가가 어떤 자리에서 일해왔는지를 요약합니다. 개인전을 여는 미술가가 아니라 현장에 거는 미술가였다는 뜻입니다.

씨앗페 출품작 두 점 읽기

씨앗페에 들어온 최병수의 작품은 두 점이고,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한 점은 1990년의 목판 작업, 한 점은 2025년의 철 작업입니다.

〈장산곶매〉 — 1990년, 한지에 목판, 84.7x45.6cm

한지에 목판으로 찍은 작업입니다. 84.7x45.6cm의 세로 화면입니다. 목판은 판을 파고 찍는 과정을 거치는 형식이고, 나무를 다루는 손이 그대로 드러나는 매체입니다.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의 이력과 재료가 겹치는 지점입니다. 한국 현대 판화의 계보에 관심 있는 분께도 권할 만한 한 점입니다.

최병수, 〈장산곶매〉, 한지에 목판, 84.7x45.6cm, ₩2,000,000
최병수, 〈장산곶매〉, 한지에 목판, 84.7x45.6cm, ₩2,000,000

〈그림움이 물들면〉 — 2025년, 철제, 32x140x500cm

철제 작업이고, 크기가 32x140x500cm입니다. 긴 변이 5미터입니다. 벽에 거는 그림이 아니라 공간에 놓는 작업이며, 실내 벽면보다는 마당이나 로비, 정원처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자리를 필요로 합니다.

철이라는 재료도 짚어 둘 만합니다. 2017년 그가 이한열 동산에 세운 것도 쇠 동상이었습니다. 천에 그린 것은 걷히고 지워질 수 있지만 쇠는 그 자리에 남습니다. 지워지는 벽화에서 출발한 작가가 오래 남는 재료로 옮겨간 경로를, 이 한 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최병수, 〈그림움이 물들면〉, 철제, 32x140x500cm, ₩50,000,000
최병수, 〈그림움이 물들면〉, 철제, 32x140x500cm, ₩50,000,000

최병수 작가 페이지에서 두 점을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서의 자리

최병수의 자리는 한국 민중미술 안에서도 독특합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주요 인물 다수가 미술대학을 거쳤지만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노동자 출신 작가가 그 시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 흐름이 어떤 종류의 미술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술계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미술계 바깥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민족미술협의회 벽화분과에서 활동했다는 이력도 같은 맥락입니다. 벽화는 소유할 수 없는 미술입니다. 사고팔 수 없고, 옮길 수 없고, 벽의 주인이 지우면 사라집니다. 1980년대에 벽화를 택한다는 것은 미술 시장 바깥에서 일하겠다는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가 1980년대에 멈추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걸개그림에서 환경 설치로, 서울에서 여수로, 천에서 철로. 대상은 계속 바뀌었지만 방식은 같습니다. 문제가 벌어지는 자리로 가서, 그 자리에서 보일 것을 만드는 것.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최병수가 씨앗페에 작품을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지원금이 끊기는 일이 어떤 것인지 겪어 본 작가가 이 구조에 참여했다는 사실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돈줄이 막히면 작업이 멈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판단입니다.

최병수를 처음 만나는 분이라면 순서를 이렇게 잡아 보시길 권합니다. 먼저 "직업이 뭐냐" "목수다"로 시작하는 1986년의 조서 이야기를 읽으십시오. 그다음 〈장산곶매〉의 매체를 보십시오. 한지에 목판 — 나무를 다루던 손이 나무를 파서 그림을 찍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림움이 물들면〉의 크기를 보십시오. 5미터. 이 작가의 화면은 언제나 멀리서 보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최병수 작가 페이지에서 작품 두 점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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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최병수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60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서울 상도동에서 자란 미술가입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 작가로, 가정형편 때문에 전수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중국집 배달원·보일러공·전기공·목수 등 노동 현장을 전전했습니다. 1986년 벽화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으며 화가가 됐고, 1987년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Q. 어떻게 화가가 됐나요? A. 1986년 목수로 일하던 중 신촌 벽화사건·정릉 벽화사건에 연루돼 경찰 조사를 받았고, 이때 경찰이 그의 직업을 '목수' 대신 '화가'로 기재하면서 화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본인은 "독재정권 때문에 1호 관제화가 된 거야"(오마이뉴스, 2019년 6월)라고 회고했습니다.

Q.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어떤 작품인가요? A. 1987년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를 추모해 제작한 대형 걸개그림으로, 연세대학교에 설치됐습니다. 2017년 30주기를 맞아 최병수는 이 그림을 본뜬 쇠 동상(높이 3m·폭 1.2m)을 연세대 이한열 동산에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Q. 환경미술 작업도 하나요? A. 현장미술가·설치작가·환경운동가로 활동 영역을 넓혀, 1996년부터 국제 환경회의 현장에서 얼음 펭귄 조각 등 환경 관련 퍼포먼스와 설치를 선보였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전남 여수 백야도로 이주해 정착했습니다.

Q. 개인전은 언제 열었나요? A. 2020년 광주광역시 갤러리 생각상자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별이 된 이한열〉 등 20여 점을 전시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최병수 작품은 몇 점이고 어떤 것인가요? A. 두 점입니다. 〈장산곶매〉(1990, 한지에 목판, 84.7x45.6cm, ₩2,000,000)와 〈그림움이 물들면〉(2025, 철제, 32x140x500cm, ₩50,000,000)입니다. 작가 페이지에서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Q. 최병수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최병수는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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