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원주로 옮겨간 뒤 40년, 김진열은 시외버스터미널을 오가는 이웃들을 그려왔습니다. 얼굴을 지우고 몸짓만 남기는 방식, 녹슨 철판으로 만드는 부조, 그리고 씨앗페 출품작 여덟 점을 안내합니다.
김진열 — 얼굴을 지워야 몸이 살아난다

초상을 그리는 화가는 대개 얼굴에 가장 공을 들입니다. 김진열은 반대로 합니다. 얼굴을 지웁니다.
"사람들은 얼굴이 보이면 표정에만 시선이 집중된다", "얼굴을 지워야 몸이 살아나고, 비로소 몸 전체를 통해 그 사람의 삶과 존엄을 바라볼 수 있다" — 강원일보(허남윤 기자), 2026년 6월 11일
이 두 문장이 김진열의 작업 전체를 설명합니다. 그가 그리는 대상은 원주시외버스터미널을 오가는 평범한 이웃과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그리되 얼굴을 지우고 몸짓과 자세만 남깁니다. 표정을 없애야 자세가 보이고, 자세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 들어 있다는 판단입니다.
씨앗페에 들어온 김진열의 작품은 여덟 점입니다. 2013년 석 점, 2023년 한 점, 2026년 넉 점. 제목은 〈기다리기〉, 〈어슬렁...〉, 〈함께〉처럼 대부분 동사이거나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이 하고 있는 짓을 제목으로 삼는 화가입니다.
강릉에서 원주로
김진열은 1952년 강원도 강릉 옥계에서 태어났습니다. 홍익대학교 응용미술학과에서 학사를, 같은 대학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습니다.
1981년 '자르기' 개인전으로 데뷔합니다. 이때 그가 택한 방식이 이후의 작업을 예고합니다. 정제된 모더니즘 화면 대신 자르고 찢고 덧대는 거친 방식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 한국 화단에서 매끈하게 다듬는 대신 훼손하고 이어 붙이는 쪽을 골랐다는 것은, 완결된 화면보다 만들어진 흔적을 남기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1986년, 그는 원주로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이 이주가 그의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원주에서 그는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무위당)의 생명사상, 협동조합운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협동조합운동은 서로 돕는 구조를 직접 만들어 쓰는 운동이고, 생명사상은 작고 약한 것을 중심에 놓는 사유입니다. 한 화가가 서른네 살에 그런 사상의 자장 안으로 들어갔다면, 그 뒤의 작업에서 무엇이 주인공이 될지는 대체로 정해집니다. 김진열의 화면에 이름 없는 이웃들이 올라오는 것은 소재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디서 살기로 했는가의 결과입니다.
그는 상지영서대학교(현 상지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총장을 역임했습니다. 2017년에는 제2회 박수근미술상을 받았습니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와 2017년 평창비엔날레에 참여했습니다.
작업의 문법 — 몸짓, 그리고 녹슨 철판
김진열이 자기 작업의 전제로 삼는 문장은 짧습니다.
"모든 삶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든 것에는 존엄성이 배어 있습니다." — 강원일보(허남윤 기자), 2026년 6월 11일
이 전제에서 앞서 본 방법이 나옵니다. 사람의 모든 것에 존엄이 배어 있다면 얼굴만 그릴 이유가 없습니다. 손의 위치, 어깨의 기울기, 서 있는 자세에도 똑같이 배어 있을 테니까요. 얼굴을 지우는 것은 지우는 일이 아니라 나머지를 보게 하는 일입니다.
무엇을 보고 그리는지도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약자들의 삶에는 세상의 모든 모순이 다 배어 있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지나다 원주 거리를 배회하듯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하루 종일 그곳을 서성이고 있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가슴도 아프고, 저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경기신문(우경오 기자), 2025년 8월 29일
갈 때 서 있던 사람이 올 때도 서 있었다는 관찰. 이 화가가 사람을 보는 시간 단위가 순간이 아니라 하루라는 뜻입니다. 〈기다리기〉나 〈어슬렁...〉 같은 제목이 왜 나오는지가 여기서 설명됩니다. 그가 포착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지속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화면에 올리는 것입니다.
재료에 대해서도 그는 분명한 설명을 남겼습니다. 김진열은 녹슨 철판과 폐종이 같은 폐자재를 활용한 부조·설치 작업을 회화와 병행해왔습니다.
"녹슨 철판의 결이 나무의 나이테나 사람의 피부와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버려진 것들을 작품으로 되살리는 과정 자체가 부활이자 재창조" — 강원일보(허남윤 기자), 2026년 6월 11일
버려진 것을 되살린다는 말이 재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 둘 만합니다. 그가 그리는 사람들도 대체로 세상이 눈여겨보지 않는 쪽입니다. 녹슨 철판을 화면으로 삼아 터미널의 이웃들을 새기는 작업은, 재료와 대상이 같은 처지에 놓인 경우입니다. 1981년의 '자르기'에서 자르고 덧대던 손이 40년 뒤에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작가가 관객에게 바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이름 없는 이웃들이지만 세상을 지탱하는 주인공들"이라며 "몸짓 하나하나에 담긴 삶의 무게와 존엄을 함께 느껴주셨으면 한다" — 강원일보(허남윤 기자), 2026년 6월 11일
원주 40년
2026년, 김진열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6월에는 원주 치악예술관에서 개인전 〈원주 40년을 회고한다, 1986~2026 원주시대〉가 열렸습니다. 제목에 들어간 두 연도가 그의 이주 해와 올해입니다. 한 도시에서 보낸 40년을 그대로 전시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7월에는 순회 아카이브전 〈김진열 아카이브: 일어나다, 받들다, 보듬다〉가 열렸습니다. 원주 치악예술관에서 7월 1일부터 4일까지, 서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7월 13일부터 8월 14일까지 이어졌고, 강원특별자치도와 강원문화재단이 후원했습니다.
전시 제목에 들어간 세 동사를 보십시오. 일어나다, 받들다, 보듬다. 전부 몸으로 하는 일입니다. 얼굴을 지우고 몸짓을 남기는 화가의 회고전 제목으로 이보다 적절한 조합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에 앞서 2024년 2월에는 서울 종로구 김종영미술관에서 특별초대전 〈용·龍,用,勇〉이 열렸습니다.
씨앗페 출품작 여덟 점 읽기
씨앗페에 들어온 김진열의 작품은 여덟 점이고, 세 시기로 나뉩니다. 2013년 석 점(25.5x37.5cm), 2023년 한 점(25.5x37.5cm), 2026년 넉 점(혼합재료). 전부 작은 화면입니다. 가장 큰 것이 한 변 37.5cm이고 2026년 작업들은 19.5x27cm입니다. 서재 책상 앞이나 복도, 침실처럼 가까이서 보는 자리를 위한 크기입니다.
작은 화면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작가의 태도와 맞물립니다. 이름 없는 이웃의 한나절을 그리는 그림이 벽 하나를 다 차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2013년의 석 점 — 각 25.5x37.5cm
제목이 전부 동사에서 왔습니다. 〈비 그침〉, 〈어슬렁...〉, 〈함께〉. 세 점이 같은 해, 같은 크기입니다. 〈어슬렁...〉의 말줄임표는 그 동작이 끝나지 않았다는 표시로 읽힙니다.

- 〈비 그침〉 · 2013 · 25.5x37.5cm · ₩1,200,000 · 작품 페이지 →

- 〈어슬렁...〉 · 2013 · 25.5x37.5cm · ₩1,200,000 · 작품 페이지 →

- 〈함께〉 · 2013 · 25.5x37.5cm · ₩1,200,000 · 작품 페이지 →
〈기다리기〉 — 2023년, 25.5x37.5cm
제목이 이 작가의 시선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한 점입니다. 기다리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작이고, 터미널은 사람들이 그 동작을 하는 자리입니다. 앞에서 읽은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는 관찰이 그대로 제목이 된 경우로 읽을 수 있습니다.

- 25.5x37.5cm · ₩1,200,000
- 작품 페이지 →
2026년의 넉 점 — 혼합재료
가장 최근의 작업들입니다. 매체가 혼합재료로 기재돼 있습니다. 폐자재를 작업에 끌어들여온 작가의 이력을 떠올리면, 이 표기가 가리키는 폭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목이 앞 시기와 달라졌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흥양천 쇠백로〉와 〈보리숭어〉는 새와 물고기의 이름이고, 〈문화의 거리〉는 장소의 이름입니다. 동사에서 명사로, 사람에서 장소와 생물로 제목의 축이 옮겨갔습니다.

- 〈흥양천 쇠백로〉 · 2026 · 혼합재료 · 19.5x27cm · ₩1,000,000 · 작품 페이지 →

- 〈문화의 거리〉 · 2026 · 혼합재료 · 19.5x27cm · ₩1,000,000 · 작품 페이지 →

- 〈보리숭어〉 · 2026 · 혼합재료 · 19.5x27cm · ₩1,000,000 · 작품 페이지 →
넉 점 가운데 〈이녀아재〉는 크기가 확인 중입니다.

- 〈이녀아재〉 · 2026 · 혼합재료 · 크기 확인 중 · ₩1,000,000 · 작품 페이지 →
여덟 점을 한자리에 놓으면 13년이 보입니다. 김진열 작가 페이지에서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서의 자리
김진열의 자리를 정하는 좌표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2017년 제2회 박수근미술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화가의 이름을 딴 상을, 터미널의 이웃들을 그려온 작가가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좌표는 '원주'입니다. 한국 미술의 제도와 시장은 서울에 집중돼 있고, 많은 작가들이 서울에서 활동하거나 서울을 경유합니다. 김진열은 1986년 원주로 가서 40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 40년이 민중미술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독립된 자리를 만듭니다. 1980년대 미술 운동이 대체로 광장과 사건을 향했다면, 김진열은 한 도시의 버스터미널이라는 좁고 반복되는 자리를 40년 동안 들여다봤습니다.
그가 원주에서 받아들인 것이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의 생명사상, 협동조합운동이었다는 사실은 이 차이를 설명해 줍니다. 협동조합은 큰 사건을 일으키는 조직이 아니라 일상을 함께 굴리는 구조입니다. 그 사유 안에서 미술은 일상을 계속 보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지금, 씨앗페에서
김진열이 씨앗페에 여덟 점을 낸 이유는 자신의 사정 때문이 아닙니다. 씨앗페에 작품을 내놓은 작가들은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연대자들입니다.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가고,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협동조합운동의 자장 안에서 40년을 보낸 화가가 상호부조 구조에 작품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이 작가의 이력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대목일지 모릅니다. 서로 돕는 구조를 만들어 쓰는 방식을 원주에서 보고 배운 사람입니다.
김진열을 처음 만나는 분께는 제목부터 읽으시길 권합니다. 기다리기, 어슬렁, 함께, 비 그침. 어느 것도 사건이 아닙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이 화가가 40년 동안 해온 일입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이름 없는 이웃들이지만 세상을 지탱하는 주인공들"
작가의 말입니다. 얼굴이 지워진 그 사람들을 오래 보고 있으면, 지워진 것이 무엇이었는지가 오히려 또렷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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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Q. 김진열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A. 1952년 강원도 강릉 옥계에서 태어난 화가입니다. 홍익대학교 응용미술학과와 같은 대학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고, 1981년 '자르기' 개인전으로 데뷔했습니다. 1986년 원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무위당)의 생명사상·협동조합운동에 영향을 받았고, 이후 원주시외버스터미널을 오가는 평범한 이웃과 소외된 사람들을 그려왔습니다.
Q. 왜 얼굴을 지우고 그리나요? A. 본인은 "사람들은 얼굴이 보이면 표정에만 시선이 집중된다", "얼굴을 지워야 몸이 살아나고, 비로소 몸 전체를 통해 그 사람의 삶과 존엄을 바라볼 수 있다"(강원일보, 2026년 6월 11일)고 설명했습니다.
Q. 녹슨 철판을 쓰는 이유는? A. 녹슨 철판·폐종이 등 폐자재를 활용한 부조·설치 작업을 회화와 병행합니다. 본인은 "녹슨 철판의 결이 나무의 나이테나 사람의 피부와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버려진 것들을 작품으로 되살리는 과정 자체가 부활이자 재창조"(강원일보, 2026년 6월 11일)라고 밝혔습니다.
Q. 수상 이력과 주요 전시는? A. 2017년 제2회 박수근미술상을 받았습니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와 2017년 평창비엔날레에 참여했고, 2024년 2월 서울 김종영미술관 특별초대전 〈용·龍,用,勇〉, 2026년 6월 원주 치악예술관 개인전 〈원주 40년을 회고한다, 1986~2026 원주시대〉, 2026년 7월 순회 아카이브전 〈김진열 아카이브: 일어나다, 받들다, 보듬다〉를 열었습니다. 상지영서대학교(현 상지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2018~2020년 총장을 역임했습니다.
Q. 씨앗페에 나온 김진열 작품은 몇 점이고 가격대는? A. 여덟 점입니다. 2013년 석 점과 2023년 한 점은 25.5x37.5cm에 ₩1,200,000, 2026년 넉 점은 혼합재료로 ₩1,000,000입니다(〈이녀아재〉는 크기 확인 중). 작가 페이지에서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Q. 김진열 작품을 사면 어디로 수익이 가나요? A. 작품 판매 수익의 대부분은 작가에게 직접 갑니다. 일부는 예술인 상호부조 기금에 적립되어 금융 차별을 겪는 동료 예술인의 저금리 대출 재원이 됩니다. 김진열은 자신이 그 차별의 당사자여서가 아니라, 동료 예술인을 돕기 위해 작품을 내놓은 연대자로 씨앗페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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